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9일(현지시간) 인도 뉴델리에서 열린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에 대한 국제사회 대응에 보조를 맞출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공동성명에는 러시아를 겨냥한 직접적인 언급이 빠진 채 '우크라이나 분쟁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는 데 그쳤다. 미국의 인도 태평양 전략상 두 핵심 국가 정상 간 만남이었지만 오랜 기간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온 인도 측의 이견으로 모양새가 틀어진 것이다.
기시다 총리의 인도 방문은 취임 후 첫 대면 정상회담이었다. 앞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오미크론 변이 확산으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와는 각각 화상회담을 치렀다. 기시다 총리에게 이번 정상회담은 인도와 수교 70주년을 맞아 '기시다 외교'의 색깔을 드러내는 의미가 컸다. 그런데 회담 준비 과정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발생했다. 그러면서 러시아에 우호적인 인도를 국제적인 대러 공조 대열에 어디까지 끌어들일지가 성과를 드러내는 초점이 됐다.
그러나 인도는 앞서 유엔의 대러 비판 결의에 기권했고 경제 제재에도 동참하지 않았다. 미국·일본·호주·인도 4개국 안보협력체 '쿼드(Quad)' 정상들이 이달 3일 화상회담 후 발표문에 러시아를 명시해 비판하지 못한 것도 인도 때문이었다. 인도는 수입 무기의 60~70%가 러시아제다.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최신형 방공미사일 시스템 S400을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기시다 총리는 정상회담에서 “러시아에 의한 침략은 국제질서 근간을 흔드는 심각한 사태로 의연히 대응해야 한다”고 일본의 입장을 전했다. 하지만 회담 후 공동기자회견에서 모디 총리는 러시아는 물론 우크라이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지정학적 상황”만을 거론하며 “인도와 일본의 파트너십 강화”를 말하는 데 그친 것이다.
반면 일본은 공동성명에 우크라이나를 비중 있게 넣는 데 주력했다. 결국 성명에는 “모든 나라가 무력에 의한 위협 또는 무력의 행사, 일방적인 현상 변경 시도에 호소하지 말고 국제법에 따라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해야 한다. 우크라이나의 분쟁, 인도적 위기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성명은 또 “전투행위의 즉시 중지를 요구한다"며 "분쟁 해결을 위해서는 대화와 외교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인도의 의향을 반영해 러시아는 언급하지 못했고 ‘침공’이란 표현 대신 ‘분쟁’이란 용어가 들어갔다. 인도는 “러시아를 고립시키면 중국과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우려하는 입장이라고 일본 요미우리신문은 전했다.
인도는 러시아 비판을 끝까지 피하면서도 일본으로부터 대규모 투자 약속을 챙겼다. 기시다 총리는 5년간 5조엔(약 51조 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했다. 요미우리는 “국익을 엄밀히 따져 주요국과 관계를 유지하는 인도의 전통적인 ‘전방위 외교’가 이날 회담에서도 나타났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