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렌스키의 연설

입력
2022.03.18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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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나치 독일의 영국 공습이 다가온 1940년 6월 취임 한 달도 안 된 총리 윈스턴 처칠이 하원에서 연설을 한다. "우리는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을 것이다. 끝까지 해낼 것이다. 바다에서, 대양에서 싸울 것이다. 하늘에서 싸워 우리의 섬을 지켜내고 해안에서도 들판에서도 거리에서도 언덕에서도 싸울 것이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이다." 결사항전의 의지를 유려한 말솜씨로 풀어내 국민의 단결을 끌어 낸 이 연설은 20세기의 명연설로 꼽힌다.

□ 러시아의 무력 침공에 맞서고 있는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 8일 영국 의회 화상 연설에서 이 대목을 그대로 인용했다. 젤렌스키는 연설 중 또 '햄릿'의 명대사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다"를 끄집어내 "분명히 답하건대 살아야 한다"고 강조해 박수를 받았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끌어내기 위해 세계 각국 의회를 상대로 릴레이로 벌이는 젤렌스키의 연설이 화제다. 능수능란한 말솜씨에다 그 나라 상황에 잘 맞춰 준비된 연설문 덕분이다.

□ 그는 17일 독일 의회 연설에서 "지금 베를린 장벽이 아니라 유럽에 자유와 부자유의 벽이 세워지고 있다"며 "그 벽을 부숴달라"고 요청했다. 하루 전 미국 의회에서는 "1941년 진주만을, 2001년 9월 11일을 떠올려보라. 그 일을 우리는 매일 겪고 있다"며 공감을 이끌어 냈다. 지난 1일 유럽의회에서는 성경을 연상케 하는 "생명은 죽음을 이기고, 빛은 어둠을 이긴다"는 연설로 기립 박수를 받았다. 동시통역자들이 목메고 눈물을 감추지 못할 정도다.

□ 10대에 코미디언으로 연예계에 발을 디딘 젤렌스키는 키이우국립경제대학 재학 중 배우로 활동의 폭을 넓혔고 졸업 후 드라마 제작사를 세워 직접 시나리오도 쓰는 만능엔터테이너였다. 오랜 연애 끝에 결혼한 부인 올레나 젤렌스카도 그의 제작사에서 작가로 활동했다. 군사력 열세에도 우크라이나가 이만큼 버텨내고 또 세계의 지지를 모아내는 데 젤렌스키의 연설이 한몫한다. 지도자의 감동적인 연설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김범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