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석 지층에서 인류의 미래를 본 고인류학자

입력
2022.03.21 04:30
24면
Richard Leakey ,1944.12.19~2022.1.2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1859)을 내고 약 반 년이 지난 1860년 6월 30일, 영국과학발전협회 연례회의가 옥스퍼드대 강당에서 열렸다. '다윈의 불도그'라 불린 열혈 지지자 토머스 헨리 헉슬리와 신학 진영의 새뮤얼 윌버포스 주교가 벌인 저 유명한 '진화론-창조론' 논쟁이 시작됐다. 달변의 독설가 윌버포스는 진화론을 '인과론의 품위에 못 미치는 가설일 뿐'이라며 헉슬리에게 "만약 당신이 원숭이 후손이라면, 그 조상이 할아버지 쪽인지 할머니 쪽인지 밝혀달라"고 조롱했고, 헉슬리는 진화론의 논거를 옹호한 뒤 자신이 원숭이의 후손이라 해도 전혀 수치스럽지 않지만 "교양과 웅변의 재능을 편견과 오류를 조장하기 위해 악용한 사람의 후손이라면 매우 수치스러울 것"이라고 되쏘았다. 창조론의 계승자들은 지금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다윈 이후 과학은 인간 기원과 진화에 대한 연구를 본격화했다. 고인류학이 그렇게 탄생했다.

조핸슨의 Y자 계통수에 X표를 긋다

120년 뒤인 1981년, 미국 방송인 월터 크롱카이트의 CBS 과학 토크 시리즈 '유니버스- 인간의 기원' 편에 당시 고인류학계의 신성(新星) 도널드 조핸슨(Donald C. Johanson, 1943~)과 전통의 명가인 루이스-메리 리키 가문의 후계자 리처드 리키(Richard Leakey, 1944.12.19~2022.1.2)가 초대됐다.

조핸슨은 박사학위도 받기 전인 74년 에티오피아 하다르(Hadar)에서 당시로선 가장 오래된, 최소 318만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 뼈화석 '루시'를 발굴해 각광받던 이였다. 그는 '루시'의 직립보행 흔적 등을 근거로 루시를 유인원에서 갈라져 나온 '최초의 인류'라 선언했고, 인근서 나란히 발굴한 13명 이상의 뼈화석을 묶어 '최초의 가족'이라 주장했다.
반면 리처드는 전설적인 고인류학자 부모 손에 이끌려 젖 뗄 무렵부터 아프리카 북동부 '동아프리카지구대(Great Rift Valley)'를 누비며 화석 사냥으로 뼈를 굳힌 '백전 노장'이었고, '호미니드 갱(Hominid Gang)'이라 불린 그의 발굴팀과 함께 190만 년 전 호모 하빌리스와 160만년 된 호모 에렉투스 '투르카나 소년(Turkana Boy)'등 무려 30여 종의 뼈화석을 발굴하며 인류 아프리카 기원설을 이끌어온 이였다.

구도는 쇠한 챔프 리처드와 막강한 도전자 조핸슨의 대결이었다. 조핸슨은 자신이 그린 'Y'자 형태의 인류-발생 진화 계통수를 의기양양 펼쳐 뿌리에 '최초의 인류 루시'를 두고 가지 한쪽에는 리키 일가가 발굴한 '보이세이(boisei) 등 멸종한 계보를, 다른 쪽에는 호모 하빌리스- 에렉투스로 이어진 현생인류의 계보를 그려 보였다.

하지만 골짜기 어딘가엔 루시보다 오래된 뼈화석들이 있으리란 걸 경험으로 알고, 인류가 유인원 공통 조상에서 분기한 시점이 최소 600만년 전이라 여겼던 리처드는 조핸슨의 그림에 단호한 'X'자를 긋고는, '결론을 짓기엔 아직 화석 증거가 턱없이 부족하다'며 커다란 물음표를 그려 넣었다. 리처드는 방송 직후 싸움 붙이기 식 토크쇼를 "불행한 일(unfortunate)"이라 평했고, 조핸슨은 "내가 이겼다"고 선언했다.

과학 저술가 핼 헬먼은 '과학사 대논쟁 10가지'(이충호 옮김, 가람기획)'란 책에서 둘의 논쟁을 소개하며 조핸슨의 얄팍함을 표나게 부각했지만, 사실 리처드의 공명심과 호승심도 조핸슨 못지않았다. 하지만 고고학계를 휘어잡은 스타 학자를 상대로 학부 졸업장도 없던 리처드가 그려 보인 물음표는 결과적으로 과학(자)의 도그마적 발상에 대한 타당한 비판이었다. 루시 이전 화석들이 이후 잇달아 발굴됐고, 인류 진화 양상도 조핸슨의 계통수처럼 도식적이기보다 리처드가 상정한 '덤불'처럼 훨씬 복잡하다는 사실도 점차 드러났다.

케냐 '투르카나 유역 연구소(TBI)' 소장 로렌스 마틴(Lawrence Martin)은 설립자인 리처드의 업적을 "인류 진화와 관련된 화석 증거의 거의 절반이 그와 그의 발굴팀이 이룬 성과"라고 평했고, 내셔널 지오그래픽은 그를 "모험을 마다 않는 호전적 리얼라이프 인디애나 존스"라 표현했다. 사파리 사냥과 탐사 가이드로 생계를 잇던 청년기 이력에다, 학계 은퇴 후 케냐 야생동물보호국을 이끌며 전개한 밀렵과의 전쟁, 케냐 정계의 부패 공직자들과 벌인 사투, 석연찮은 비행기 추락사고로 두 다리를 잃는 등 최소 네 차례 죽을 고비를 넘긴 일화 등을 환기한 평가였다. 케냐에서 나서 다방면에서 분투하며, 아프리카의 고인류학적 유산과 케냐의 자연을 자신의 방식으로 사랑하고 지키고자 했던 '가시 돋친 영웅(Prickly hero)' 리처드 리키가 별세했다. 향년 77세.

동아프리카지구대의 화석 광맥을 누빈 이들

지구는 중생대 공룡 시대를 거쳐 약 6,000만 년 전 신생대 포유류 시대를 맞이했다. 학계는 호미니드(Hominid), 즉 인류가 600만~1,000만 년 전 영장류 공통조상에서 분화한 것으로 추정한다. 인류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갈라져 나왔는지는 고인류학의 궁극적 연구주제이고, 뼈화석은 그 의문의 핵심 열쇠다. 따라서 관건은 언제나 화석이었고, 학자의 명성과 업적도 화석 발굴에 크게 좌우돼왔다. 2차대전 이후 고인류 뼈화석 발굴의 주요 광맥은 단연 영장류의 고향이자 다윈이 인류 기원지로 추정한 아프리카였다.

리처드 리키는 1944년 12월 19일, 루이스-메리 리키 부부의 세 아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선교사 아들로 케냐에서 태어난 아버지 루이스(1903~1972)는 만 23세 때인 1926년 첫 탐사에 나선 이래 숨질 때까지 탄자니아 동아프리카지구대 올두바이 협곡을 자신의 제국처럼 누비며 걸출한 동료 학자인 두 번째 아내 메리 리키(1913~1996)와 함께 175만 년 전 화석인 '진잔트로푸스 보이세이(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 등 수많은 화석·유물을 발굴, 아프리카 기원설의 토대를 굳힌 학자다. 또 그는 침팬지의 제인 구달, 마운틴고릴라의 다이앤 퍼시, 오랑우탄의 비루테 갈디카스 등 '리키의 천사들'이라 불리는 영장류학자 삼인방의 초기 연구 및 정착을 지원한 이력으로도 유명하다.

부부는 뜨겁고 메마른 발굴 현장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녔고, 리처드도 만 3세 무렵부터 흙장난을 시작했다. 리처드가 멸종 포유류인 '자이언트 피그(giant pig)'의 거의 완벽한 턱뼈 화석을 찾아낸 건 만 6세 때였다. 하지만 아버지가 그 화석을 냉큼 차지했고, 리처드는 "무척 화나고 속상했다"고 훗날 썼다. 리키 일가의 평전 '조상을 향한 열정(Ancestral Passions,1995)'을 낸 저술가 버지니아 모렐(Virginia Morell)은 일가의 화석 탐사가 낭만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실은 가족 구성원간 질투와 경쟁, 불화의 연속이었다"고 썼다. 모렐에 따르면 리처드는 "한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는, 뭐든 해야만 하는 활동가 타입의 아이"였다.

가족과 사이도 나빴던 데다 외진 골짜기에 갇혀 지내는 데 질린 리처드는 만 16세에 현지 중등학교를 중퇴하고 부모에게 500 파운드를 빌려, 훗날 그의 탐사대 '호미니드 갱(The Hominid Gang)'의 핵심 멤버로 활약하게 되는 카모야 키메우(Kamoya Kimeu, 1940~) 등과 함께 사냥 및 화석 판매, 사파리 투어 가이드 사업을 시작했다. 61년 항공 면장을 따고는 경비행기를 몰고 관광객과 연구자들을 안내하기도 했다. 20대의 그는 이미 사냥에 능한 초원의 모험가이자, 전문가 못지않은 화석 감각과 식견을 지닌 '인디애나 존스'였다.

그가 한 발굴단 안내인으로서 탄자니아 북부 나트론 호수(Lake Natron) 인근서 꽤 가치 있는 뼈화석을 찾아낸 적이 있는데, 연구자들이 대뜸 그를 '텐트 보이(tent boy, 허드렛일꾼)'처럼 밀쳐낸 적이 있었다고 한다. 유년기 올두바이 협곡에서처럼 그는 화가 났지만 동시에 장래에 대한 불안과 걱정도 깊어졌다. 그가 한 탐사대에서 만난 영국인 고고학자 마거릿 크로퍼(Margaret Cropper)와 사귀며 64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대 입학 시험을 치른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듬해 크로퍼와 결혼한 뒤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 케냐로 건너와 탐사를 시작했다. 둘은, 루이스-메리 부부의 관계처럼 처음부터 삐걱거렸고 69년 딸(Anna)을 낳고는 이혼했다. 리처드는 70년 동물학자 겸 고인류학자 미브 리키(Meave Leakey, 1942~)와 재혼해 딸 둘을 더 낳고 해로했다.


아버지 루이스가 이끌던 에티오피아 오모(Omo) 강 탐사대 일원으로 일하던 1968년, 후원금을 얻기 위해 내셔널지오그래픽 측과 가진 미팅에서 리처드가 보인 태도는 그의 기질을 단적으로 짐작케 한다. 아버지와 일절 상의 없이 리처드는 다른 곳에서 독립 탐사를 해볼 테니 후원금을 나눠달라고 요청했다. 케냐-에티오피아 접경지 루돌프 호수(현 투르카나 호) 인근 쿠비포라(Koobi Fora) 지역이 뼈화석 발굴의 적지란 걸 혼자 알고 있다가 그 자리에서 공개한 거였다. 지오그래픽 측은 "성과가 없으면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단서를 달아 그에게 후원금을 나눠 줬다. 이후 약 20년간 리처드 팀은, 아버지 루이스가 평생 이룬 것을 능가하는 성과를 쿠비포라에서 이뤘다. 69년의 파란트로푸스 보이세이, 72년의 호모 루돌펜시스, 75, 78년의 호모 에렉투스 두개골 화석 등등. 키메우가 84년 발굴한 호모 에렉투스 '투르카나 소년' 은 가장 완벽한 형태를 갖춘 고인류 화석으로 꼽힌다.

압수한 상아 더미에 불을 붙이다

리처드 리키는 89년 발굴 현장을 아내 미브와 둘째 딸 루이즈(Louise)에게 맡기고 사실상 은퇴, 케냐 야생보호국(KWS) 국장에 취임했다. 코끼리 밀렵으로 케냐 정부를 향한 국제적 비난이 쏟아지던 때였고, 당시 대통령 대니얼 아랍 모이(Daniel Arap Moi)는 세계적 명사인 리처드에게 이미지 회복 임무를 맡긴 거였다. 취임 직후 리처드는 외신 기자들을 나이로비 국립공원 광장에 모아놓고 압수 상아 12톤을 태우는 세기의 이벤트로 자신의 의지를 과시했다.
2017년 작고한 탄자니아 코끼리들의 수호자 '웨인 로터(Wayne Lotter)의 삶을 소개하며 살펴본 것처럼, 밀렵 단속은 현지 공무원과 국제 밀무역 네트워크와의 전쟁이다. 리처드는 중무장한 정예 팀을 꾸려 밀렵꾼에 대한 현장 사살 권한까지 부여한 뒤 거의 전쟁을 치렀고, 그 의지와 성과를 인정받아 이듬해 세계은행으로부터 1억4,000만 달러 보호기금을 타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정부 내에 적잖은 적을 두게 됐다.
93년 그는 단속요원 등 4명을 태우고 경비행기를 몰다 기관 고장으로 추락, 두 다리를 잃는 중상을 입었다. 그는 고의 사고라고 주장했지만 진상은 끝내 밝혀지지 않았고, 야생보호국 비리 의혹까지 제기되자 94년 결국 퇴임(당)했다. 그는 정적들의 음해라고 항변했다.

리처드는 이듬해 '사피나(Safina, 스와힐리어로 '방주'라는 뜻) 당'이란 정당을 창당했다. 케냐 정부는 97년 총선 직전에야 그의 정당을 승인했고, 그는 의원에 당선됐다. 그 무렵 케냐 정부는 부패 등 오명으로 유엔 등 국제사회의 각종 지원이 끊겨 힘겨워하던 때였다. 모이 정권은 그를 다시 국무총리에 임명했다. 그는 99년 공무원 고용-해고 권한을 지닌 케냐의 독특한 법적 기구인 '시빌 서비스(Civil Service)' 의장까지 맡아 약 2년 간 무려 2만 5,000여 명의 공무원을 해고하는 단호한 부패척결로 IMF와 세계은행으로부터 2억5,000만 달러 기금을 받아냈지만, 그의 개혁이 법원 등에 의해 저지 당하면서 2001년 퇴임했다.

리처드는 이듬해 미국 뉴욕 스토니브룩 대학 교수가 됐다. 대학 측과 함께 케냐 현지에 '투르카나 유역연구소'를 설립했고, 2004년 아프리카 야생 보호 및 활동가 지원 NGO 'WildlifeDirect'를 출범시켰다. 2015년 케냐 대통령 우후루 케냐타(Uhuru Kenyatta) 정권에 의해 다시 야생보호국 의장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렇게 평생 그는 거의 공백 없이 활동했고, 77년의 명저 '오리진(Origins, 공저)'을 비롯해 자서전 등 약 10권의 책을 썼다.

인류의 미래를 위한 실천의 호소

말년의 리처드는 뉴욕 세계무역센터 부지 설계자인 폴란드 출신 미국 국적 건축가 대니얼 리버스킨드와 함께, '투르카나 보이'가 살던 케냐 리프트 밸리를 내려다보는 루다리야크(Loodariak) 언덕에 '응가렌(Ngaren)'이란 이름의 인류사 박물관 건립 작업에 몰두했다. 인류 탄생과 진화, 다양성, 전쟁, 질병, 기후위기에 이르는 모든 역사를 담겠다는 포부였다. 그는 '과거는 미래의 열쇠'라 했던 아버지 루이스의 말을 좇아 '고인류학과 보존은 인류의 과거와 미래에 깊이 연루된 활동'이라 말하곤 했다. 2024년 개관 예정인 응가렌을 그는 "단지 또 하나의 (인류사)박물관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실천의 호소(a call to action)"라고 표현했다. 응가렌은 투르카나어로 '시작'을 뜻한다.
"오래 전 멸종한, 아마 인류가 누릴 시간보다 훨씬 오래 번성했던 수많은 종들이 켜켜이 묻힌 화석 지층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누구나 인류의 필멸성을 환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유언대로, 그는 그 시작의 언덕에 묻혔다.

최윤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