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보러 산에 간다… 동해와 나란히 호젓한 산행

입력
2022.03.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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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강릉 강동면 ‘산우에바닷길’

강릉을 여행지로 선택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다다. 시내에서 가까운 경포대를 비롯해 북쪽 주문진과 남쪽의 정동진까지 강릉 바다는 두루 친숙하다. 남쪽 강동면에 조금은 색다르게 강릉 바다를 조망하는 트레킹 코스가 있다. 이름하여 ‘산우에바닷길’이다. ‘산 위’를 지역 사투리 그대로 옮긴 작명이다. 안인진에서 정동진까지 해변이 아니라 산길로 걷는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산행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길로, 해발 300m 안팎의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한다. 힘들지 않지만 아주 쉬운 길도 아니다. 붐비는 관광지가 여전히 부담스러운 시절, 찾는 이가 많지 않아 한나절 호젓하게 걸을 수 있는 코스다.


안보길, 바우길, 해파랑길… 이름은 많은데 소문나지 않은 길

시작 지점은 안인진이다. 조선 성종 때까지 수군만호 군영이 있던 곳이다. 마을 언저리에 봉화를 올리던 해령산이 있고, 군선천이 흘러드는 바닷가에 명선문(溟仙門)이 있다. ‘바다에서 신선이 들어오는 문’이라는 뜻이다. 군사시설 보호구역 안에 있는 바위로, 지난해 해동암각문연구회에서 사료로만 전해지던 바위의 실체를 확인했다.

한때 군인과 어민들로 북적거렸을 테지만 지금의 안인진은 한가롭기만 하다. 작은 포구 옆에 또 그만한 해변이 딸려 있고, 한적한 바다를 찾는 여행객을 기다리는 카페와 식당이 몇 있을 뿐이다. 마을 북쪽에 짓고 있는 화력발전소만 유난히 커 보인다.




안인삼거리 도로변의 주차장이 등산로 출발점이다. 안내판에는 ‘산우에바닷길’이 아니라 ‘안보체험등산로’라 표기돼 있다. 동해 바닷가의 철책이 하나둘씩 사라지는 추세지만, 안인진에서 정동진에 이르는 해안 철책선은 여전히 단단하고 날카롭다. 이유가 있다.

1996년 9월 18일 안인진 바로 아래 해안에서 북한 잠수함이 발견돼 나라가 발칵 뒤집히는 사건이 있었다. 암초에 좌초된 잠수함에는 인민무력부 정찰국 소속 특수부대원 26명이 타고 있었고, 택시기사가 잠수함을 발견됐을 때는 이들 모두가 강릉 일대 산악으로 침투한 뒤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육군 28개 부대, 해군 1개 함대, 공군 1개 전투비행단 등 군인과 예비군, 경찰병력을 투입해 49일간 소탕작전을 벌여 13명을 사살하고 1명을 생포했다. 11명은 살해된 채 발견됐다. 이 과정에서 우리 측도 군인 11명, 예비군 1명, 경찰 1명, 민간인 4명이 사망하는 불행을 겪었다. 잠수함이 좌초한 해변 언덕 강릉통일공원에 이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세워져 있다. 북한 잠수함을 전시한 구역은 정비 중이어서 직접 볼 수는 없는 상태다.



산우에바닷길은 강릉바우길 8구간이기도 하다. 17개 구간 400㎞에 달하는 ‘강릉바우길’은 바위가 많은 강원도의 길을 친근하게 부르는 명칭이다. 바빌로니아 신화에 등장하는 바우(Bau)에 빗대기도 한다. 한 번 어루만지는 것으로 죽을병을 낫게 한다는 건강의 여신이다. 이 길은 또한 강원 고성 통일전망대에서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에 이르는 해파랑길(750㎞) 강릉 구간과도 겹친다.

언뜻언뜻 보이다 탁 트이는 동해바다

산우에바닷길은 전체 9.4㎞, 괘방산(344m) 능선을 따라 쉬엄쉬엄 4시간가량 걸린다. 낮다고 얕볼 산은 아니다. 바닷가에서 출발하니 해발고도에 에누리는 없다. 시작부터 가파른 계단이다. 해발 100m 가까이 단숨에 오른다. 계단 중간에 작은 쉼터가 있다. 시원한 바닷바람 맞으며 숨을 고른다. 거친 숨소리에 바람소리와 파도소리가 섞인다.


계단이 끝나면 부드러운 흙길이 이어진다. 소나무가 감싸고 있는 오솔길이다. 완만한 오르막으로 걷다 보면 기분 좋게 이마에 땀이 맺히는 정도다. 왼편으로는 나뭇가지 사이로 쪽빛 바다가 어른거린다. 그렇게 능선에 닿으면 나무는 키를 낮추고 바다는 조금씩 넓어진다. 숨바꼭질하듯 감질나게 모습을 드러내던 바다는 해발 292m 활공장에서 갑자기 탁 트인다. 정식 명칭은 ‘통일공원 제2활공장’이다. 주말과 휴일 패러글라이딩 연습 조종사 이상의 자격을 가진 사람만 이용할 수 있다고 하니, 등산객에게는 그저 전망 좋은 쉼터일 뿐이다.

활공장 앞뒤로 제법 넓게 덱을 깔아 놓았다. 북한 잠수함 침투사건 희생자를 기리는 통일공원과 해안도로가 수직으로 내려다보이고, 그 앞으로 봄빛 머금은 동해바다가 무한대로 펼쳐진다. 맞은편으로는 잔설이 남은 백두대간 능선에서 강릉 시내까지 파노라마로 펼쳐진다. 능선으로 부는 바람이 상쾌하다. 볕이 따사로운 날이면 배낭을 베개 삼아 잠깐의 낮잠을 즐겨도 좋겠다.



출발지점에서 활공장까지는 약 2㎞다. 전 구간 산행이 부담스러운 등산객은 대개 이곳에서 하산한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도 되지만 강릉임해자연휴양림을 거쳐 통일공원으로 내려가는 방법도 있다. 이곳부터 산행은 능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며 지나온 길과 비슷하다. 능선을 따라 걷는 숲길이 계속된다. 복합문화공간인 하슬라아트월드 뒤편 능선을 지날 때만 다시 한 번 바다가 시원하게 펼쳐진다. 자극적인 풍광이 거의 없다는 건 이 길의 미덕이기도 하다. 찾는 사람이 많지 않아 호젓하게 나만의 산행에 집중할 수 있다. 지루함을 참을 인내심, 때로는 심심함을 즐길 구도자의 자세가 필요하다.

집 한 채 없는 깊은 산골이지만 아주 사람이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정동진을 약 4km 앞둔 지점에 홀연히 조그마한 당집이 하나 나타난다. 마치 사람 사는 집처럼 정갈하게 돌담이 둘러져 있고, 주변은 아름드리 소나무와 참나무가 호위하고 있다. 내부도 깔끔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정기적으로 관리하고 있는 듯하다. 바다가 가까우니 어촌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서낭당이라 짐작할 뿐이다. 안내문이 없으니 산중에 홀로 남은 당집의 정체가 궁금하다.


또 다른 단서도 있다. 정동진 쪽으로 다시 발길을 옮기면 솔숲이 사라지고 활엽수가 자라는 곳에 작은 늪지대가 나타난다. 허물어지긴 했지만 계단식 축대 흔적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마을이 있던 자리다. 뒤편 봉우리에도 오래된 석축의 윤곽이 뚜렷하다.

이곳을 지나면 멀리 정동진 바닷가에 크루즈 모양을 한 리조트 건물이 보이고, 가파른 내리막이 끝나면 산우에바닷길 여정도 마무리된다. 살랑거리는 봄 바다에 몸을 맡기듯, 가볍고도 개운한 산행이다. 안인진에 주차해 놓았다면 정동진역 앞에서 택시를 타면 된다. 요금은 약 8,000원.

이름값 하는 정동진, 한적한 등명해변

산을 내려와 조금만 이동하면 정동진역이다. 1962년 보통역으로 개업해 석탄 수송을 담당하던 조그만 역은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에 소개되며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문 닫을 처지에 놓였던 간이역에 해돋이열차가 운행되고, 2019년 말부터는 KTX까지 정차하는 유명 관광지가 됐다.




드라마에 등장한 소나무는 그대로인데, 수수하던 시골역 풍경은 많이 변했다. 승강장에 나가려면 입장권(1,000원)을 구입해야 한다. 여러 조형물을 설치하고 안전시설을 보강한 것까지는 좋은데, 승강장에서 백사장으로 나가는 통로까지 막혀 있다. 마을은 더 크게 변했다. 크고 작은 숙박시설, 식당과 카페가 빈틈없이 들어섰고, 역 아래쪽에는 모래시계공원이 조성돼 있다. 그래도 변함없는 건 바다다. 쪽빛 바다에는 변함없이 파도가 부서지고, 새하얀 모래사장에는 여행객의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한적함을 선호한다면 정동진 위 등명해변을 권한다. 산우에바닷길의 당집 바로 아래에 있는 작은 해변이다. 마을 규모에 비해 주차장은 넓다. 솔숲 사이 철길 건널목을 통과하면 새하얀 모래사장과 푸른 바다가 펼쳐진다. 그 흔한 조형물 하나 없는 말간 해변이다.




마을 인근 산자락에 등명낙가사라는 사찰이 있다.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 율사가 처음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1980년대에 중창하며 등명낙가사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등명은 ‘불을 밝힌다’는 의미다. 대웅전 앞 관일루에 오르면 정면으로 솟아오르는 일출이 아름다운 곳이다. 바로 옆은 강릉의 옛 지명을 딴 ‘하슬라아트월드’다. 미술관과 야외조각공원, 피노키오박물관 등을 갖춘 복합예술공간으로 바다가 보이는 언덕을 따라 두어 시간 산책을 즐길 수 있다. 입장료는 1만2,000원.

강릉=글·사진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