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담그기 시작한 지 벌써 7, 8년이다. L이 지리산까지 내려가 명인의 장 담그는 법을 배워온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 L의 건강이 여의치 않은 데다, 때마침 K가 은퇴 후 내려와 살겠다며 남양주 우리 동네 햇살 좋은 산기슭에 전원주택을 지은 터라 3년 전부터 자연스레 거점을 옮기게 되었다. 마실 가는 기분으로 참가하던 나와 달리, K는 몇 년간 스승 L의 일거수일투족을 눈여겨보며 기록을 했다. 그러더니, 이렇게 독립을 해서 따로 모임을 만든 것이다.
음력 1월 27일, 장 담그는 날은 모처럼 하늘도 맑고 봄답지 않게 따뜻했다. 옛날엔 말의 날(午) 아니면 손 없는 날로 정하거나 따로 날을 받았다지만 지금은 맑고 건조한 날이 최고다. K의 집에 도착했더니 이미 장독을 깨끗하게 씻어놓고 햇살 밝은 곳에 40여 개의 메주를 늘어놓고 말려두었다. 모임은 모두 여덟 가구, 장난삼아 '된장구락부'라는 이름까지 붙였다. 부인들이 가끔 동행하기는 해도, 어쩌다 보니 부원들이 (60대 시골남자인 나를 빼고) 모두 50대 서울 남자들이다. 오늘은 코로나 문제도 있는 터라 간잡이까지 포함해 네 가구만 모였다.
- 물 40리터당 소금 7.5㎏이에요. 잘 저어서 녹여요.
- 마른 나뭇가지 좀 주워와요. 참숯을 좀 태워서 항아리 소독하게요.
장 담그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미 K가 메주 장만부터 시작해 대개의 준비를 해두었기에 우리는 그저 소금을 녹이고 항아리를 소독하고 메주와 소금물을 장독에 넣으면 그만이다. 빨갛게 달군 숯을 항아리에 넣자 연기가 자욱이 피어오른다. K가 꿀을 가져와 항아리마다 조금씩 짜 넣는다. 여태껏 없던 일이다. "꿀은 왜 넣어요?" "연기도 잘 나오고 꿀 때문에 장의 향기도 좋아진대요." 메주와 소금물을 항아리에 넣자 K가 간잡이답게 숯과 건고추, 건대추를 추가하고 메주가 떠오르지 않게 대나무로 막아 마무리를 해준다.
장이야 우리 인간이 담그지만 장을 만들어내는 것은 바람과 햇볕과 시간의 몫이다. 콩이 굳어 메주가 되고, 메주가 소금물을 머금어 된장, 간장이 될 때까지 우리는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지방과 기온에 따라 장 가르기까지 40~60일.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필 때쯤 장을 갈라요. 그때쯤 장꽃도 활짝 피겠죠." 장이 익어가면서 소금물 위에 흰 곰팡이가 피는데 그래야 장맛이 좋아진단다. 그래서 곰팡이가 아니라 꽃이다. 장을 오래 담갔지만 늘 장꽃이 피는 것은 아니기에 봄꽃만큼이나 그리운 존재이기도 하다.
장 담그기보다 어려운 일이 장 가르기다. 그릇을 깨끗이 소독하고, 장물을 섞어가며 메주를 치대 야무지게 장독에 담고, 깨끗한 천으로 간장을 거르는 작업들이 재미있으면서 꽤나 되다. 손도 많이 필요하고 호흡도 잘 맞아야 하기에 그날은 구락부 전원이 참석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런 고된 일을 어떻게 여성들이 했을까? TV에서 보니 나이 많은 여성이 엄청나게 많은 항아리를 닦고 있던데 직접 해보니 그저 감탄만 할 일도 아닌 듯싶다.
일본식 양조간장과 된장이야 마트에 가면 쉽게 구할 수 있다. 그래도 잘 익은 토종 된장, 간장의 깊고 진한 맛을 대체할 수는 없다. 매년 거르지 않고 장을 담그는 이유다. 봄이 코앞이라지만 오늘만큼은 진달래꽃과 장꽃이 피어야 진정한 봄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벌써부터 그날이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