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위원회가 공무수행 사고로 본 장교 사망, 보훈처는 "인정 못해"

입력
2022.03.14 16:00
1989년 부대 복귀 중 사고로 숨진 장교
유족이 유공자 등록 재신청했으나 '탈락

1989년 7월 3일 오전 2시 강원 인제군 북면 용대리. 전날 내린 비에 46번 국도 노면은 젖어 있었다. 그 때 국도를 달리던 12사단 헌병대 지프 차량은 빗길에 미끄러져 도로 7m 아래로 추락했고, 탑승자 4명 중 3명이 현장에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사망자 중 한 명은 전입 한 달 밖에 안 된 신입 장교 손모 소위였다. 그의 나이는 당시 27세.

사고 당일 오전 군 당국은 채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 사건을 공무수행 중 차량사고로 결론 냈고, 이틀 뒤 유족 동의를 받아 손 소위 유골을 대전국립묘지에 안장했다. 유족들은 국가보훈처에 손 소위를 국가유공자로 인정해 달라는 신청을 넣었지만, 보훈처는 국가유공자법 등에서 정한 순직군경(군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사망)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보훈처가 이런 결론을 내린 것은 사고 당일 밤 손 소위의 외출을 무단 이탈로 봤기 때문이다. 손 소위는 당시 일직사관 근무 중 야간 근무자에게 줄 야식을 사기 위해 부대 밖으로 나갔다가 사고를 당했는데, 보훈처는 손 소위가 상급자에게 보고도 없이 부대 밖으로 나갔다고 판단했다. 직무 수행 중 발생한 사고로 볼 수 없다는 게 보훈처 결론이었다.

유족들은 억울했지만 이 결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2020년에서야 대통령 소속 기관인 군사망사고 진상규명위원회의 존재를 알게 돼 이 위원회에 억울함을 풀어줄 것을 요청했다.

진상규명위는 관련 서류와 관계자 진술 등을 토대로 보훈처와 완전히 다른 결론을 냈다. 사건 접수 6개월 후 진상규명위는 "손 소위 사망은 공무수행과 인과관계가 있다"고 판단했다. 진상규명위는 "손 소위가 당직실을 이탈한 사실은 인정되나 사단 헌병대원과 선임 장교들이 부대 안에서 규정을 위반해 연 술자리를 원만하게 끝내고, 병사 사기 높이기 위한 선의의 목적이 있었다"고 봤다. 당시 선임 장교가 손 소위에게 "밖에 나갔다 오라"고 지시나 권유를 한 사실도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 새로 드러났다.

이 진상규명위의 판단을 근거로, 유족들은 다시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넣었지만 보훈처 입장은 달라지지 않았다. 보훈처는 최근 "손 소위는 보고 없이 근무지를 이탈해, 직무수행이나 교육훈련 중 사망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고 유족들에게 통보했다.

보훈처가 유족들의 계속된 요청, 대통령 소속 진상규명위의 결론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 손 소위의 동생은 "진상규명위 조사 결과 선임 장교 지시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음에도 보훈처는 10여 년 전과 똑같은 이유를 들어 순직군경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통보했다"며 "이의신청을 하고 행정소송도 낼 계획"이라고 말했다.

진상규명위 관계자는 "진상규명위 결정을 수용할지는 국방부와 보훈처 권한"이라면서도 "예산 문제 때문인지 순직 인정 범위가 너무 좁고 (심의 과정도) 까다로운 것은 사실"이라고 지적했다.

이환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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