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문재인 대통령과 더불어민주당을 심판할 최고 적임자'로 기획 발탁됐다. 검찰총장까지 지낸 유능한 칼잡이면서 현 정권에서 탄압받은 구원(舊怨)이 있는 그를 보수와 중도가 한목소리로 불러냈다. 이번 대선은 윤 당선인 쪽으로 기울어진 운동장이었다. 그는 줄곧 대세론의 주인공이었다.
윤 당선인이 그저 편한 경쟁을 한 건 아니다. 정치 선언 8개월 차의 정치 생초보인 그는 고비마다 의외의 승부사 기질을 발휘했다. '공정과 상식의 회복'을 시대정신으로 간파한 것도 그의 감각이었다. 공정에 허기진 20대 남성 표심을 승부처로 보고 위험한 전략을 구사한 것이 독이 될 뻔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웃었다.
역설적이게도, 윤 당선인의 승리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가 상당 부분 기여했다. 윤 당선인의 실언·실책 논란, 자질 시비, 배우자 김건희씨의 도덕성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이 후보와 가족의 리스크가 동시에 터져 윤 당선인의 지지율 급락을 막았다.
여기에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회생을 위해 절치부심한 국민의힘의 쇄신 노력이 더해져 보수가 활짝 웃었다. 지난 5년간 누적된 진보의 오만과 내로남불에 날린 어퍼컷이었다.
이번 대선엔 일관된 흐름이 있었다. 1, 2위 대선후보의 지지율은 엎치락뒤치락했지만,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여론은 정권연장을 바라는 여론을 내내 큰 차이로 앞섰다. "국민이 나를 키웠다"는 윤 당선인의 말은 사실에 부합한다. 정치 경험이 전무한 '평생 검사' 윤 당선인이 제1야당 대선후보로 밀어올려진 건 순식간이었다.
윤 당선인은 한동안 정치 초보 티를 냈다. 정권교체 열망을 지지율로 온전히 흡수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학습이 빨랐다. 악재를 만나 지지율이 빠졌다가도 지지율을 곧바로 반등시켰다. 국민의힘은 '오뚝이 리더십'이라고 불렀다.
국민의힘 선거대책본부 관계자는 "유권자들이 윤 당선인을 높이 사는 지점은 '정치에 물들지 않아 유연하다는 것"이라며 "그게 정치인 윤석열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와의 야권 후보 단일화를 극적으로 성사시킨 것도 윤 당선인의 승부수였다. 후보 단일화 효과에 대한 평가는 분분하지만, 이 후보의 막판 반전 카드인 '국민통합정부 구성' 드라이브의 힘을 뺐다.
윤 당선인은 지난해 6월 대권 도전을 선언하면서 "내 사전에 내로남불은 없다"며 공정·정의·상식의 회복을 약속했다. 공정과 정의는 윤 당선인에게 맞춤옷과도 같았다. 검사 시절 그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살아있는 권력'에 칼을 들이댔다. "사람에 충성하지 않는다"는 말은 그의 브랜드가 됐다. 강골 검사로 산 그의 이력과 시대정신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대선 승리로 귀결된 것이다.
이재묵 한국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박근혜 정부의 국정 농단과 문재인 정부의 극단적인 편가르기 정치에 모두 실망한 중도층이 유독 많았는데, 이들에겐 윤 당선인의 리더십이 상대적으로 안정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윤 당선인과 문재인 대통령의 상반된 이미지에서 승인을 찾기도 한다. 문 대통령의 통치 스타일이 진중하지만 느린 반면, 윤 당선인은 저돌적이고 시원한 모습을 자주 보였다. 직설적인 화법이나 어퍼컷 제스처는 그의 트레이트마크가 됐다. 정권교체를 원하는 민심이 문 대통령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지도자를 찾았다는 뜻이다.
국민의힘은 작정하고 쇄신했다. 국민의힘은 2017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좀처럼 살아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이후 총선과 지방선거 등 전국단위 선거에서 내리 4번 지면서 암흑기가 길어질 듯했다.
지난해 4·7 재·보궐선거를 계기로 정권심판 민심이 무르익었고, 국민의힘은 이를 놓치지 않았다. 지난해 6월 30대의 '0선'인 이준석 대표를 당의 간판으로 바꾸는 파격을 감행했다. 논쟁적 전략을 밀어붙인 이 대표의 등장은 국민의힘에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이념 색채가 옅은 2030세대가 국민의힘에 눈길을 주기 시작하자, 윤 당선인은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 "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발언 등으로 20대 남성 표심을 노골적으로 겨냥했다. 윤 당선인은 여성 표심을 대거 잃는 대신 남성 청년 민심을 막강한 우군으로 얻었다.
대선을 관통한 '네거티브 전쟁'이 윤 당선인의 약점인 '국정운영 자질 시비'를 가려 준 역할도 컸다. 윤 당선인과 이 후보가 도덕성 공방으로 몇 개월을 흘려보내면서 유권자들의 눈을 '과거'에 붙잡아 둘 수 있었다.
배우자 리스크도 마찬가지다. 윤 당선인의 배우자 김건희씨의 허위 이력 논란은 상당한 악재였으나, 이 후보 배우자 김혜경씨의 법인카드 사적 유용 의혹이 터져 상쇄됐다.
이준한 인천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국민의힘이 잘한 것보다 민주당이 잘못한 반사 이익이 큰 대선 결과"라며 "윤 당선인이 분열됐던 민심을 봉합하고 상처 입은 리더십을 바로 세우는 게 대통령으로서 첫 과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