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억만장자들이 뿔났다.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자산 가치가 급속히 쪼그라들었기 때문이다. 대놓고 전쟁 반대를 외치며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각을 세울 정도다. 국제사회 지탄을 받는 푸틴 대통령은 내부 아우성부터 단속해야 할 처지다.
‘러시아판 구글’로 불리는 검색엔진업체 얀덱스는 러시아를 대표하는 정보통신기술(ICT) 기업이다. 아르카디 볼로시 최고경영자(CEO)의 지분 가치는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일주일간 최소 60% 이상 떨어졌다. 포브스는 2일(현지시간) “한때 26억 달러가 넘었던 볼로시의 자산은 현재 5억8,000만 달러로 줄었다”고 추산했다. 억만장자 선정 기준인 ‘10억 달러(약 1조2,000억 원)’에 한참 못 미치는 수준으로 급감한 것이다. 미국 나스닥에 상장된 얀덱스의 시가총액은 지난해 11월 300억 달러를 웃돌아 러시아 최대 ICT 기업으로 손색이 없었지만 불과 넉 달도 안 돼 67억 달러로 추락했다.
러시아 디지털은행 틴코프의 설립자 올레그 틴코프는 더 속이 쓰리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주가가 90% 넘게 하락하면서 그의 손실 규모가 50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에 틴코프의 자산은 8억 달러에 그친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졸지에 글로벌 억만장자 대열에서 제외된 것이다. 틴코프의 시총도 230억 달러에서 10억 달러로 줄었다. 이처럼 우크라이나 사태 여파로 억만장자 칭호를 잃은 러시아의 부호는 10여 명에 달한다.
이들은 억울할 법하다. 물론 푸틴 대통령과의 친분을 과시하거나 러시아 정부의 지원을 등에 업고 부를 축적하긴 했다. 하지만 군사물자를 생산하거나 서구의 러시아 제재 대상이 아닌데도 푸틴 대통령의 성급한 개전 결정으로 인해 유탄을 세게 맞았다. 지정학적 위험과 정세 불안이 고조되면서 러시아 경제가 흔들려 주가와 루블화 가치가 폭락한 탓이다. 전장과 한참 동떨어져 뒷짐지고 있던 ICT 기업의 수장들이 전쟁의 혹독한 대가를 먼저 치른 셈이다.
체코 투자은행 우드앤코의 일다 다플레친 선임연구원은 “상황이 바뀌지 않는다면 얀덱스가 투자한 회사들에 자금을 댈 충분한 여력이 없을 것”이라며 “얀덱스 자체는 제재에서 자유로울지 몰라도 VTB 같은 주주들은 제재 명단에 올라 있다”고 지적했다. 러시아 국책은행이자 제2 은행인 VTB는 지난달 25일 조 바이든 대통령이 러시아 침공을 규탄하며 푸틴 대통령을 ‘침략자’라고 규탄할 당시 제재 명단에 올린 곳이다. 유럽연합(EU)도 2일 VTB를 비롯한 7개 러시아 은행을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 망에서 퇴출시켰다.
순식간에 막대한 부를 잃은 억만장자들은 푸틴 대통령을 향해 반기를 들었다. 러시아 최대 민간은행 알파뱅크의 미하일 프리드만 설립자는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전쟁은 해법이 아니고, 전쟁으로 많은 생명을 앗아가 수백 년간 형제처럼 지낸 양국에 큰 피해를 줬다”고 강조했다. 틴코프는 파이낸셜타임스에 “우크라이나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다”며 “이런 상황은 생각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