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럴센스'가 드러낸 건 고작 변태적 노동환경뿐

입력
2022.03.05 04:30
12면
<60> 할리퀸 로맨스에서 벗어날 순 없나

편집자주

젠더 관점으로 역사와 과학을 읽습니다. 역사 에세이스트 박신영 작가는 '백마 탄 왕자' 이야기에서 장자상속제의 문제를 짚어보는 등 흔히 듣는 역사, 고전문학, 설화, 속담에 배어 있는 성차별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번갈아 글을 쓰는 비평 전문가 이연숙 작가는 영화, 미술, 만화 등이 여성을 어떻게 그리는지를 통해 성별화된 감정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동명의 웹툰을 원작으로 둔 넷플릭스 영화 '모럴센스'는 공개 전부터 'BDSM'이라는 자극적인 소재를 국내에서 영상화했다는 사실 때문에 큰 주목을 받았다. BDSM이란 '구속(Bondage)', '훈육(Discipline)', '가학(Sadism)', '피학(Masochism)'의 약어로, 일종의 '역할 놀이'를 통한 힘의 교환에서 기쁨을 얻는 성적 실천을 의미한다.

참여자들 간 상호 합의가 포함되기만 한다면 어떤 '일탈적' 행위도 허용된다. 이러한 역할 놀이에는 우리가 흔히 연상하듯 '가죽 옷'을 입은 사람들이 서로 맞고 때리며 즐기는 행위도 포함되고, 폭력 없이 오직 명령을 통한 지배와 복종의 수사를 주고받는 일종의 연극적 각본이 포함되기도 한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이상의 소위 '변태적' 취향을 갖는 것은 최소한 BDSM의 영역에서는 놀랍지 않다. 어차피 변태적이란 '정상적인 성행위', 즉 남성과 여성의 일대일 정상위 삽입 성교를 제외한 모든 성적 행위에 해당되는 수식일 테니 말이다.

퀴어 이론가이자 문화 인류학자인 게일 루빈이 말했듯, 우리 문화의 섹스/젠더 체계에서 이러한 '정상적인 성행위'는 '좋은' 것이고 그렇지 못한, 즉 "동성애, 혼인 관계가 아닌, 문란한, 출산하지 않는, 상업적인 성교"는 '나쁜' 것으로서 재생산된다. '좋음'과 '나쁨'이라는 도덕적 가치 판단은 해당 사회의 지배 규범과 가치 체계를 반영하므로 몇몇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처럼 '개인의 취향'으로만 남을 수 있는 성역은 존재할 수 없는 셈이다. 어떤 섹스는 좋고 그래서 옳으며 어떤 섹스는 나쁘고 그래서 틀렸다는 판단의 근거가 우리 삶을 이루는 물질적/정신적 토대들과 연결돼있는 한, 섹스는 다른 모든 사적 행위들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공적이고 정치적인 행위인 것이다.


그렇기에 모럴센스를 둘러싼 SNS상의 논의가 'BDSM의 양지화'에 집중된 것은 당연하다. SM 취향이 있는 당사자든, 여성 억압의 문화적 형식으로서 BDSM에 우려를 표하는 페미니스트든 간에, 이들은 아는 사람들만 즐겨야 할 '음지 문화'가 넷플릭스라는 영향력 있는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는 것을 불편하게 여긴다.

이들의 논리는 결국 모럴센스라는 '잘못된' 재현물에 영향을 받은 누군가가, 특히 자신을 보호할 힘이 없는 젊은 여성들이 모방적 행동을 통해 위험한 길로 빠지지 않겠냐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 모럴센스는 대선 토론이나 '나 홀로 집에' 같은 연말 특선 가족 영화, 세계문학전집과 트위터만큼이나 모방적 행동을 유발할 수 있고 그러므로 해로울 수 있을 것이다.

BDSM보다 더 유해한 회사 내 괴롭힘

이런 비난을 의식적으로 염두에 둔 듯 모럴센스는 다소 지루할 정도로 교육적인 태도로 'DS(지배와 복종이라는 뜻)' 관계가 얼마나 '상호 합의'와 '안전'을 바탕에 두고 있는지, 그리고 여성 '에세머(SM 행위를 즐기는 사람)'가 얼마나 많은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래서일까. 모럴센스로 인한 'BDSM 양지화'를 우려하는 사람들의 의견과는 대조적이게, 영화의 어디에도 모방하고 싶을 만큼 매혹적인 성애 묘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어디서 협찬을 받은 것이 분명한 앙증맞은 SM 소도구들이 눈에 띌 뿐이다. 더구나 '환희에 찬' 표정을 연기하는 배우들의 얼굴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예쁘기만 해서, 그들의 '플레이(SM 행위)'가 과연 누구 한 명에게라도 쾌락적이기나 한지 의문이다.

사실, 만일 누군가가 모럴센스를 작정하고 따라하려 한다면, BDSM보다 더 문제적인 것이 바로 '회사 내 괴롭힘'이 아닐까? 막 인턴에서 신입이 된 한 사원은 무뚝뚝한 여성 주인공에게 불쌍하다 싶을 정도로 무시당한다. 시대착오적인 성희롱을 일삼는 꼰대 팀장은 물론이고 두 주인공의 '성적 취향'을 심문대에 올리는 회사 임원들은 어떤 의미에서 수치와 모욕 주기라는 '수치 플레이(상대에게 수치를 주는 SM 행위의 일종)'를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는 계약도 합의도 없으니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일방적인 폭력이 될 뿐이겠다.

더구나 모럴센스의 스토리는 대부분 회사를 배경으로 전개되는데, 이들 중 누구도 제 시간에 퇴근하는 것 같지 않다. 퇴근할 수 없으니 회사 내에서 '주인님(자신을 지배해 줄 파트너)'을 구할 수밖에 없고, 불 꺼진 사무실에서 '플레이'를 빙자한 야근을 한다. 한국은 연간 근로시간이 평균 1,908시간으로 OECD 회원국 중 세 번째로 오래 일하면서 행복지수는 최하위권인, 처참한 삶의 질을 자랑하는 국가다. 모럴센스가 재현하는 BDSM보다 더 자극적인 것이 바로 그들의 노동 환경이 아닌가?


돌고돌아 결국 '전통적 이성연애'로

결국 모럴센스가 '유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재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BDSM이라는 소재를 통해 차별화되려는 영화의 의지(?)가 어떻게 뻔하고 시시한 방식으로 BDSM을 재현하는지에 달려있을 것이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모럴센스를 통해 '남녀 관계의 정상성'에 의문을 던지고자 했다지만, 영화는 오히려 BDSM을 진정한 사랑의 과도기 정도로 여기는 듯하다. 우리 모두 변태적인 구석이 하나쯤 있다는 메시지는 좋다. 그런데 모럴센스의 어느 구석이 변태적인 채로 남아있는가? 영화의 결말부에 이르러 모럴센스는 진정한 사랑의 힘으로 치유된 두 사람이 더 이상 '역할 놀이'에만 의존하지 않고 '성인 남녀 간의 정상적인 섹스'라는 합의에 도달한듯한 장면을 보여준다. '사랑하는 연인'이 된 지금, 침대 위 엎치락뒤치락하는 지배와 복종의 힘겨루기는 '진짜' 본론인 섹스의 전희가 될 뿐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모럴센스가 내세운 독립적인 '페미니스트' 여성 주인공은 물론이고 아무도 BDSM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 주인공은 BDSM을 통해 정상성에 도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남들 같은 연애를 원한다. 그녀는 그에게 사랑받기를 원하고 그가 개 짖는 소리를 내는 대신에 자기를 만져 주기를 원한다. 그리하여 한때의 '섭남(복종하는 취향이 있는 남성)'은 결국 '사랑'을 운운하며 여자의 성적 판타지를 만족시켜 줄 만큼의 '진짜 남자'가 된다. 일도 잘하고 여자의 말도 잘 듣고 심지어 섹스까지 잘하는 그는 모두의 이상적인 남자친구다. 그런 그에게 약간의 '변태성'은 최후의 승리에 쾌감을 더해 줄 톡 쏘는 향신료일 따름이다. 그는 사랑을 위해 그의 정체성의 일부인 이 취향을 (어느 정도는) 포기한다. 이제 여자로 인해 상처로부터 회복된 남자는 더 이상 계약에도 '플레이'에도 집착하지 않고 바깥에서 손을 잡고 포옹을 하는 등의 낯 간지럽도록 평범한, '일반적인 연애'의 형식에 순응한다.

이처럼 모럴센스는 여자가 남자를 '고쳐쓰는' 전형적인 할리퀸 장르의 구조를 따르며, 내 남자의 사소한 흠 따위는 교정해버리고야 마는 진정한 사랑의 위대한 승리를 보여준다. 애당초 모럴센스가 표방했던 BDSM이라는 위험한 취향은 전통적인 이성연애의 관계역학과 정상 섹스라는 안정적인 규범을 위해 제거되어야 할 시련에 불과했던 것이다. 아니, 일부 젊은 페미니스트들을 중심으로 '비섹스', '비연애', '비결혼', '비출산'이라는 이른바 '4B(非)' 실천이 페미니즘 운동의 강령으로 부상하고 있는 와중에, 무슨 '전통적인 이성연애'로의 회귀인가?

'여성은 안정적 사랑을 원한다'는 불편한 공식

여기서 우리는 '마미 포르노(엄마들이 보는 포르노라는 멸칭)'라 불리며 전 세계적으로 열광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이하 그레이)에 대한 에바 일루즈의 논평을 끌어 들여올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모럴센스와 마찬가지로 그레이 역시 BDSM을 통해 전형적인 러브 스토리를 포장한다. 그들의 불확실한 사랑에 씌워진 BDSM이라는 형식은, "역할과 아픔 그리고 아픔의 통제와 합의의 경계를 약속해 주는 확실성"을 제공함으로써 교착에 빠진 현대적 이성 관계에 대한 '지침'을 제공한다는 것이 에바 일루즈의 주장이다. 물론 BDSM이 표상하는 남자 주인공의 전 생애를 지배한 규칙들은 어차피 일생일대의 사랑인 여자 앞에서 모두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레이의 흥행은 그런 대단한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판타지를 가진 여자들, 그리고 BDSM이라는 고통의 형식을 삶의 기술로써 받아들이려는 여자들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시켜 주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페미니즘이라는 혁명적 성해방의 도구가 가져다 준 무제한의 자율성이 여성들에게 마냥 환영받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에바 일루즈는 일견 반(反)페미니즘적인 로맨스 소설인 그레이의 인기를 두고 "페미니즘 혁명이 미완의 것으로 남았다는 반증"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결국 그레이나 모럴센스나, 일견 '자극적인' 포장지를 벗겨내고 나면 그저 "안정적인 감정 결속을 이루고 싶다는 갈망"에 시달리는 여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 여자들을 내버려두고 '4B'를 고집하는, '사랑 없는' 페미니즘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이연숙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