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 5년을 돌이켜보면 취임 첫해는 대체로 엄중한 자세를 유지한 것처럼 보인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미증유 사태 수습과 9년 만에 되찾은 진보 정권에 대한 무게감이 커서였다. 하지만 1년 뒤 지방선거에서 압승할 때는 문 대통령이 “자만하지 말라”고 질책할 만큼 긴장이 풀어진 상태였다. “이제 보수는 궤멸됐다”는 말을 공공연히 했다. 지금의 “닥치고 정권교체” 여론은 그때부터 싹튼 셈이다.
대선을 열흘 앞둔 민주당은 아직 그 ‘찬란했던 봄’을 잊지 못한 모습이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정권을 뺏기기야 하겠느냐”는 정신 승리와 “현명한 국민이 올바르게 판단할 것”이라는 자기 최면에 빠져 있다. 불리한 여론조사는 인정하지 않고 패배자의 주문(呪文)인 ‘샤이’ 타령만 한다. 존재가 불투명한 ‘샤이 이재명’이 어디선가 무더기로 쏟아질 것이라는 맹목이 넘쳐난다.
민주당이 오만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증거는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지난해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전 지역구 참패라는 치욕스러운 사태는 마지막 경고였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 뭐가 잘못인지를 모르니 바꿀 것도, 달라질 필요도 없는 것이다. 답답해진 당대표가 86세대 옥쇄(玉碎)를 선언했지만 누구도 몸을 던지지 않았다. 진작 내려놨어야 할 기득권의 핵심인 선거제 개혁도 대선 며칠 남겨놓고 하겠다니 의심받는 것이다.
다수 유권자가 정권 재창출을 원하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오만해진 진보 기득권 세력이 다시 득세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서다. 비주류 이재명을 뽑는다고 그 나물에 그 밥이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불신이 팽배하다. 반성하지 않는 집단에 다시 권력이 주어지면 더 기고만장할 게 뻔하지 않은가.
민주당이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게 문제라면 국민의힘은 벌써 기득권이 굴러들어온 것처럼 오만해진 게 문제다. 요즘 유세장을 들었다 놨다 하는 윤석열 후보의 퍼포먼스와 선을 넘나드는 발언은 “원래 흥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로 넘어갈 게 아니다.
대권이 눈앞에 있는 윤 후보로선 탄압과 굴욕을 딛고 여기까지 온 스스로가 대견할지 모른다. 그러나 “벌써 대통령이 된 것 같다”는 인식을 유권자들에게 줄 수 있다. “무슨 실수를 할지 조마조마하다”는 말이 지지층에서 나오고 “벌써 기분이 업돼 있으니 대통령에 오르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고 걱정하는 이들도 있다.
안철수 후보와의 단일화 실패도 윤 후보 측의 오만 때문으로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윤 후보가 진짜 단일화를 할 마음이 있었다면 이준석 대표의 조롱과 패륜의 언행을 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되면 좋고 안 돼도 괜찮다”는 낙관론에 사로잡혀 안 후보를 여론조사 띄우기 용도로 생각했던 게 아닌가 싶다.
국민의힘 내부에는 일찌감치 자리를 놓고 논공행상이 벌어진다는 얘기가 들린다. 오죽하면 “총리 노리는 사람이 여럿 있다”고 당대표가 남의 당 사람에게 털어놓겠는가. ‘윤핵관’들은 능력보다는 남다른 눈치력을 발휘해 재빨리 올라탄 이들이 다수다. 김종인 전 위원장이 일찌감치 ‘파리떼’라고 정곡을 찔렀듯이 그들의 관심은 윤석열의 성공보다는 그로 인해 생길 자리일 것이다.
이 후보나 윤 후보 모두 국민 평균 수준보다 낫다고 하기 어려울 만큼 결함투성이 인물들이다. 지지자 가운데 상당수는 후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상대 후보 되는 게 싫어서” 투표장으로 향할 것이다. “진보ㆍ보수 진영의 결집력이 이처럼 떨어지는 선거는 처음”이라는 전문가들 분석이 괜한 게 아니다.
단임제에서 임기 5년은 길지 않다. 기분 좋은 날은 대통령에 당선된 순간뿐이라고 어느 대통령도 말했듯이 매일이 고독과 결단의 연속이다. 오만이 권력자에게 가장 무서운 말이라는 것을 빨리 깨달을수록 후회가 적을 것이다. 선거는 절박한 쪽이 이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