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폐막한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두고 여론이 시끄럽다. 개최국인 중국 선수들에게 유리한 판정을 하거나 타국 선수를 실격 처리하는 등 불공정한 올림픽이었다는 것이다. 게다가 올림픽 개회식에서 중국 내 소수 민족인 조선족이 한복을 입고 등장하는 바람에 일각에서는 "또 하나의 동북공정"이라는 분노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제 인터넷에서는 반중을 넘어 '혐중'이라고 할 만큼 중국과 조선족에 대한 반감이 거세다. "조선족은 자기 나라로 돌아가라"는 말을 할 정도다.
물론 외국인에 대한 반감이 한국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유럽을 비롯해 미국, 일본 등에서도 외국인 혐오와 더불어 자국민 중심 정책을 요구하는 흐름이 거세다. 이런 목소리는 극우파로만 한정되지 않고, 평범한 이웃들에게까지 퍼져 있다. 소위 태극기 부대와 같은 극우파가 지나친 민족주의로 비판받았다면 '우리'의 국민주의는 눈에 띄지 않을 만큼 평범하고 정상적이다. 마이클 빌리그는 '일상적 국민주의'에서 일상적 습관, 재현, 실천, 신념 등을 통해 일반 시민이 국민과 국가로 재생산된다고 지적하면서 이데올로기적 습관이 국민주의(nationalism)를 만들어낸다고 말한다. 그는 국민주의를 공공건물에 일상적으로 걸려 있는 국기에 비유한다. 집회나 시위 현장에서 열정적으로 흔드는 국기가 아니라 아무도 주의 깊게 보지 않는 학교 운동장의 국기처럼, 국민주의 역시 너무 당연해서 의식하지 않을 정도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빌리그는 일상적 국민주의가 극단적이거나 폭력적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에 온화하다고 가정하면 안 된다고 강조한다. 깃발이나 꽃, 애국심을 고취하는 노래들은 국민주의의 과시로 이야기되지 않는다. 올림픽에서의 응원도 마찬가지다. 흔히들 생각하는 국민주의는 위험하고 비합리적이며 과도하기 때문에 '우리'의 일상적 국민주의는 국민주의라고 명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국민주의는 유익하고 필수적인 자부심이다. 그렇다면 왜 일상적 국민주의가 때로는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는 형태로 등장하는 것일까.
국민주의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그들'의 정형화를 통해 우리의 국민 정체성이 확립된다고 설명한다. 중국에 대한 분노가 조선족으로 이어지는 것은, 조선족이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서 '그들'과의 경계를 훼손하기 때문이다. 이 경계가 분명할 때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다른 부정적 특질을 소유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2018년 예멘 난민 수용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의 질서를 지키지 않고, 이슬람 규범을 따르는' '그들'을 정형화하는 방식을 잘 보여주었다.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난민 수용률이 낮은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계 난민에 대한 거부감은 상당했다. 2021년 아프간 난민들이 한국에 들어왔을 때 정부가 이들을 한국을 위해 일한 '특별기여자'였음을 강조했던 것도 당시의 논란을 의식한 탓이다. 이들은 한국을 위해 일한, 한국 친화적인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외국인 혐오의 분위기가 정치인들의 입을 타고 발신되고 있다는 점이다. 유력 대선 후보가 정확한 사실 확인도 없이 외국인의 건강보험료를 재검토하겠다고 하거나 중국, 일본과의 대결 구도를 앞장서 내세운다. 외국인을 타자화하는 것은 이제 '해도 되는' 일처럼 여겨진다.
1990년대 학교에는 전체 조회가 있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전교생이 나란히 서서 국기 게양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교단을 바라보고 한 시간가량 국민 의례와 교가 제창, 훈화 등을 진행했다. 아침 등굣길에는 국기에 경례를 해야 했다. 국민교육헌장 같은 것을 외울 필요가 없던 시기였음에도 이 모든 의례는 의심 없이 계속됐다. 교문 앞에는 선도부와 주임 선생님이 일상적 의례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 학생들을 잡아내고 교칙으로 처벌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일상성은 무해함과 동의어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일상을 구성하고 있는 국민주의를 성찰하는 것이, 무엇보다 필요한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