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30년된 광주 신가동 주택단지, 왜 일제 분위기가 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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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2.26 11:00
14면

편집자주

도시는 생명이다. 형성되고 성장하고 쇠락하고 다시 탄생하는 생로병사의 과정을 겪는다. 우리는 그 도시 안에서 매일매일 살아가고 있다. 과연 우리에게 도시란 무엇일까, 도시의 주인은 누구일까. 문헌학자 김시덕 교수가 도시의 의미를 새롭게 던져준다.
<24> 광주 광산구 하남산업단지와 차관주택단지

한국은 태생부터 국제적 성격을 띤 국가다. 연합군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을 패배시킨 덕분에 독립을 이루었고, 유엔군이 6·25전쟁에서 북한·중공군을 물리친 덕분에 생존했다. 그뿐 아니라 국제연합한국재건단(UNKRA)·한미재단·국제부흥개발은행(IBRD)과 같은 국제기관들도 신생국가 한국의 정치적 안정과 경제적 성장에 큰 도움을 주었다. 오늘은 이 가운데 IBRD에서 빌린 자금으로 1980년대에 광주광역시에 건설된 시설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 광주의 대표적인 산업단지인 하남산업단지, 그리고 그 배후 주거지역으로서 조성된 신가동 차관단지다.

광주의 경제엔진, 광산구

하남산업단지와 신가동 차관단지는 광주광역시 서쪽인 광산구에 자리해 있다. 광산구는 1987년까지는 광산군이라는 독립된 행정구역이었지만 이듬해 광주에 편입되면서 광산구로 이름을 바꾸었고, 현재는 광주의 새로운 경제적 중심으로 기능하고 있다. 광주를 대표하는 신도시 지역인 수완지구, 광주의 경제엔진인 하남산업단지·광주첨단과학산업단지·빛그린산업단지 등도 광산구와 그 주변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오늘 살펴볼 광산구의 하남산단과 신가동 차관단지는 예전 광산군 비아면에 속하던 땅에 자리 잡고 있다. 최근 광주광역시에 복합쇼핑몰을 유치하는 문제가 대통령선거 정국을 흔들고 있다. 그런 가운데 현지의 모 정치인이 광주광역시에는 복합쇼핑몰은 없어도 5일장이 많이 있다는 취지의 글을 SNS에 올려서 화제가 되었다. 그 정치인이 떠올렸을 광주의 5일장 가운데 하나가, 조선시대 후기부터 존재했다고 믿는 광산구의 비아5일장이다.

옛 비아면 일대는 하남산업단지·광주첨단과학산업단지·수완지구 등이 조성되면서 옛 모습을 잃었다. 하지만 이 비아5일장을 관통하는 길은 그 이전에 조성된 신작로 그대로이다. 이 정도로 인상적인 공간이다 보니, 광주의 5일장이라고 하면 현지의 많은 분들은 송정장·말바우장과 함께 이 비아장을 거론한다.

하남산업단지, 박정희 정권에서 입안돼 5공 때 착공

옛 광산군 비아면에 들어서 있는 하남산업단지는 원래 박정희 정권 때인 1975년부터 개발 계획이 수립되었으나, 당시에는 실현되지 못했다. 1978년 5월 18일 자 동아일보 '광주공단 700만 평 지정'이라는 기사에는 건설부가 "17일 오후 전남 광산군 하남면 장덕저수지 중심반경 2.75㎞ 일대 718만3,000평을 광주 제2공업단지로 지정, 이날 자로 기준지가를 고시"했으며, "세계은행차관자금과 정부 및 전남도 투융자로 건설될 이 공업단지는 1979년 말에 착공될 예정"이라는 내용이 보인다. 한국에서 최초로 산업단지가 건설된 것이 1962년의 울산공업센터였음과 비교하면, 13년이나 늦은 스타트였다(전남대학교출판부 '광주 경제 지도').

이렇게 늦게 스타트한 하남산업단지는, 그나마 건설 자금을 빌려주기로 한 IBRD와 한국 정부 사이에 견해 충돌이 있어서 착공이 자꾸만 늦어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과 광주민주화운동 등이 일어났다. 비로소 하남산업단지 제1단지 공사가 시작된 것은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난 1980년의 이듬해인 1981년 1월이었다. 마지막 단지인 제3단지가 준공된 것은 1991년 2월이었다.

하남산업단지 건설이 한창이던 1987년 5월 11일 자의 매일경제신문에는 '우리 도에 공장을 <4> 전남(광주)'라는 기사가 실렸다. 이 기사에서는 "경인·부산권에 비해 뒤늦게 공업화에 뛰어든 전남은 개발이 뒤진 만큼 개발에 대한 기대와 관심, 그리고 노력이 어느 지역보다 돋보인다"며 전라남도 지역의 공업화 열기를 강조한다. 기사에서는 1960~70년대 수출주도형 공업화가 경부 축을 중심으로 이뤄졌고, 전남은 식량증산을 위한 농도(農道)로서만 역할이 강조되다 보니, "이 지역의 대도시인 광주는 생산기반이 거의 없이 소비도시로만 성장, 각 기업의 판매장이 되는 대리점도시가 됐다"며 안타까워하고 있다.

소비도시 광주를 생산도시로!

그런데 기사의 이어지는 대목에는 중요한 개념이 등장한다. "이로 인해 이 지역 상공인들이 '광주권 생산도시화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여 본촌공단·송암공단·하남공업단지 등이 잇따라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광주권 생산도시화 운동'은 다른 지역에 비해 낙후되어 있는 광주권을 생산도시로 만들어서 소득을 높이자는 움직임을 가리킨다.

1970~80년대에 광주의 경제계에서 일어난 '광주권 생산도시화 운동'을 증언하는 것이, 1991년에 하남산업단지에 세워진 '광주권 생산도시화의 탑'이다. 타오르는 횃불 모양의 이 탑에는 당시의 시장과 광주상공회의소 회장이 남긴 헌정사가 적혀 있다. "여기 무등벌에 터 잡은 하남공업단지. 밝고 활기찬 광주인의 꿈이 영그는 생산도시화의 영원한 상징이 되소서"(시장), "여기 하남공업단지는 상공인들의 의지가 그 초석이 되었음에 자랑스럽다. 광주권의 밝은 내일을 위하여 우리는 생산도시화의 횃불을 밝혔으니, 빛나거라 횃불이여, 영원히 빛나거라"(광주상공회의소 회장).

하남산업단지가 한창 조성중이던 1983년, 공단으로부터 동남쪽으로 1㎞ 정도 떨어진 비아면 신가리에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하남산업단지와 마찬가지로 IBRD의 차관을 받아 조성한 곳이다. 내가 이곳의 존재를 안 것은 2년 전이었다. 차관을 받아 조성된 신가리 주택단지는 "30년 이상 된 주택밀집 지역으로 건물노후도가 심하며 골목이 비좁아 소방차도 들어갈 수 없는 도로가 많아 주거환경 개선이 시급한 지역"(2012년 12월 21일 자 광산저널 '신가동 주택재개발사업 '가속화' - 조합설립 용적률 218%… 54개동 총 4,030가구 신축')이라는 현지 언론 보도를 통해서였다.

공단 옆 주택단지도 설립, 그러나...

30년 정도 된 주택단지의 노후도가 심하다는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 지역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보니 30년은 양반이었고, "20여 년 전 IBRD 차관을 들여 조성됐으며 좁은 골목길과 오래된 주택들로 도시기반시설이 열악한 곳"(2006년 6월 28일 자 광주드림 '신가지구 재개발 급히 가다 '주춤'')이라는 기사도 있었다. 이러한 기사들이 재개발을 부추기는 과장 보도가 아니라면, 1983년에 이 주택단지를 조성할 때부터 무언가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이리하여 찾아간 광주광역시 북구 신가동의 차관단지. 건물주가 집을 비웠음을 알리는 공가(空家) 표시와 O자 낙서, X자 낙서 등이 단지 곳곳에서 확인되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건물 내부로 들어갈 수 없어서, 건물 내부가 얼마나 열악한 상태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1983년도에 조성했다는 주택단지가, 마치 식민지 시기에 지어진 관사·사택단지처럼 길쭉한 단층의 '나가야'(長屋)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리고 길쭉한 나가야를 두 집이 나누어서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제국주의 일본이 패망한 뒤 한국 곳곳의 관사·사택단지를 적산가옥(敵産家屋)으로서 불하할 때, 길쭉한 건물을 두 집에 불하하면서 나타나는 것과 비슷한 현상이었다. 신가동 차관단지를 답사하면서 전체적으로, 이곳이 1980년대에 지어진 주택단지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는 인상을 받았다. 이런 곳은 한국의 그 어떤 다른 지역에서도 보지 못했다.

지은 지 20~30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마치 백 년 전에 지은 것 같은 신가동 차관단지. 주민들이 거의 빠져나가서 으스스한 느낌을 주는 골목길을 걸으며, 옛 시대의 흔적을 오늘에 전하는 도시화석을 여럿 확인했다. 이곳이 광산군 비아면 신가리이던 시절에 붙여졌을 '종합화장품 / 신가리 센타' 간판, 그리고 1995년에 광주광역시로 호칭이 바뀌기 전에 불리던 '광주직할시'라는 지명 등.

2년 전에는 재개발을 앞두고 을씨년스러워진 이 차관단지를 혼자 급히 다니다 보니, 스스로 납득할 만큼 지역 전체를 꼼꼼히 답사하지 못해서 아쉬운 마음이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모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촬영하러 광주에 가게 된 김에, 하루 먼저 광주로 가서 광주전남연구원의 김만호 연구위원과 다시 한 번 차관단지로 향했다. 하지만 불과 몇 개월 전에 신가동 차관단지는 대로변의 상가를 제외한 모든 건물의 철거가 끝난 상태였다. 처음 가서 보는 구도심의 모습이, 마지막으로 보는 그곳의 모습일 경우가 많다. 2020년 가을에 처음 가서 본 신가동 차관단지의 기이한 모습은, 이로써 나에게 영원한 수수께끼로 남게 되었다.

아름다운 간이역, 극락강 철도역사

오늘은 이미 사라져서 다시는 답사할 수 없는 신가동 차관단지를 소개했다. 이대로 끝나면 아쉬우니, 옛 신가동 차관단지 근처의 눈에 띄는 근대 유산을 한 곳 소개해드리고 싶다. 경전선 극락강역 철도역사와 철도관사 건물이다. 식민지 시기에는 남조선철도라 불렸고, 한때는 광주선이라 불리다가 지금은 경전선 광주선이라 불리고 있는 광주송정역-광주역 11.9㎞ 구간의 중간에 자리한 역이다. 신가동 차관단지는, 입주할 주민들이 이 역을 이용해서 광주 도심과 송정으로 간다는 전제를 깔고 조성되었을 것이다.

1959년에 지어진 극락강역 철도역사는 2013년에 철도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9년에는 최우수 테마역으로 선정될 정도로 아름다운 간이역이다. 내가 이곳을 찾았을 때에도 청년들이 이곳에서 영화를 찍고 있었다.

극락강역에 가신 분들은, 역사를 향한 채 오른쪽을 바라보면 일본식 가옥을 한 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이 건물은 1922년에 극락강역이 업무를 시작한 뒤에 이곳에서 일하는 철도원을 위해 세워진 철도관사다. 현지 관계자분의 말씀에 따르면, 극락강역 철도역사는 보존 예정이지만, 이 철도관사 건물은 보존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원래 같으면 철도역사와 철도관사가 한 세트로 보존되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여러 사정으로 인해 그렇게 보존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니, 어쩌면 곧 사라지게 될지도 모르는 극락강역 철도관사 건물을 부디 잊지 않고 기억에 담아두시면 좋겠다. 그리고 이 건물을 보면서, 1980년대에 지어졌지만 식민지 시기에 지어진 것 같았던 기이한 신가동 차관단지를 상상해보시길.



글·사진=김시덕 문헌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