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력 단절이 아닌 엄마의 역량으로"...청년 심리 보듬는 50대 여성들

입력
2022.02.26 15:00
50대 여성들의 청년 심리지원 프로젝트 '모락모락'
"경력 단절 겪는 여성의 재취업 문턱 낮아졌으면"
이수경 대표 "엄마로서의 시간, 역량으로 인정해야"

오승미(57)씨는 대학 졸업 후 바로 결혼하며 선생님의 꿈을 접어야 했다. 역사학과를 졸업했고 중등교원자격증도 있었지만 아이들이 생기며 '선생님'보다는 두 살 터울 딸과 아들의 '엄마' 역할에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딸은 지적장애가 있어 네 살부터 언어치료를 받아야 했다. 오씨는 "큰아이의 치료와 작은아이의 육아를 책임지며 밖에서 일을 한다는 건 꿈조차 꾸지 못했다"고 말했다.

심리 지원 서비스 '모락모락'은 '일하고 싶은' 50대 여성들을 다시 밖으로 불러냈다. 이들은 상담 능력이 있는 50대 경력 단절 여성들의 청년 심리 지원 서비스를 준비하고 있다. '엄마'로서의 경험이 경력 단절이 아닌 더 큰 '역량'이 될 수 있는 초석을 놓기 위해서다.


경력 단절 여성이 다시 일하기 위해서는

오씨는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라고 나서야 다시 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남편의 학원에서 4년 정도 강사로 일한 것을 제외하고 그가 교원자격증을 살려 일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다. "일을 할 수 있는 방법을 몰랐고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주위엔 다 주부들이라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오씨는 아는 언니의 가게 청소와 서빙부터 베이비시터, 보험사 일까지 어떤 일이든 마다하지 않았다.

제대로 된 재취업 준비를 할 수 있었던 건 아이들이 모두 취업을 하고 나서인 작년부터다. 오씨는 여성인력개발센터를 찾아 여러 자격증을 취득했다. "요양보호사 자격증과 사회복지사 자격증은 '모든 엄마들의 자격증'이라고 불린다. 혹시 몰라 일단 땄다"며 웃었다. 취업 시장에 나온 50대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아이 돌봄이나 요양보호사 등 돌봄노동에 한정적인 경우가 많다. 실제로 여성인력개발센터의 구인정보는 대부분 베이비시터나 요양보호사를 구하는 공고다.

오씨는 중랑여성인력개발센터를 통해 모락모락을 만났다. 모락모락은 50대 시니어 상담사를 모집하기 위해 서울권 여성인력개발센터에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 이수경 대표는 "당시 센터에서 감정코칭지도사 수업을 받고 있던 승미 선생님을 소개받았다. 수업에 대한 열의도 높으시고 스터디도 지속적으로 하고 계시다고 해서 함께하게 됐다"고 말했다. 오씨는 "우리 엄마들을 이해해주고 경력 단절을 알아준 것만으로 너무 고마웠다"며 "이런 프로젝트가 잘돼서 경력 단절을 겪는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문턱이 조금이나마 낮아지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고 전했다.


"심리지원 통해 청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 됐으면"

지난해 4월 처음 시작한 모락모락 서비스는 현재 사회적 기업으로 가는 과정에 있다. 실제 서비스로의 도약을 위해 MVP(최소기능제품) 1차 테스트를 마치고 여러 지원 사업에 도전해 더 큰 사회적 기업이 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모락모락의 청년 심리 지원 프로그램은 세 가지로 구성된다. 첫 단계는 자기 이해 워크북이다. 이를 통해 청년은 자신의 마음에 대해 스스로 진단하는 과정을 거친다. 그 다음은 상담사의 손편지인 '공감 레터'다. 청년의 고민을 미리 받은 상담사는 손편지에 공감과 지지를 담아 내담자와의 친밀감을 형성한다. 마지막으로는 50분간의 상담이 예정돼 있다.

오승미씨는 청년들에게 손편지를 쓰며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편지로 청년들에게 함부로 조언을 할 수는 없었다"며 "응원의 말을 먼저 건넸다"고 전했다. 청년들과 공감대를 찾기 위해 영화도 찾아봤다. 심리 지원을 신청한 한 청년의 닉네임이 영화 '트와일라잇' 속 여주인공인 '벨라'였기 때문이다. 아들에게 조언을 얻기도 했다. 오씨는 "아들과 '모락모락'에 대해 대화를 많이 나눈다"며 "어떻게 이야기를 들어줘야 할지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됐다"고 밝혔다.

그는 "요즘 청년들은 삶에 대해서 고민도 많고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다"며 "그들의 어려움을 들으며 기성세대로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컸다"고 말했다. "대화를 통해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 싶다"고도 덧붙였다. 실제로 '모락모락'의 심리지원 서비스를 마친 한 청년은 "상담사분의 깊은 고민의 흔적이 보여 큰 위로를 받았다"고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모락모락 이수경 대표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수경 대표는 "모락모락은 실제 우리의 어머니들을 생각하며 만든 서비스"라고 말했다. 이 대표의 어머니 역시 대학에서 음악을 전공했으나 결혼과 육아로 인해 경력 단절을 겪었다. 이 대표는 "50대 여성들 중에서도 일을 잘하는 분들이 많다. 대학을 졸업하거나 직장 경험이 있는 경우 결혼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되는 게 안타까웠다. 엄마로서의 시간도 역량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서비스 기획 배경을 밝혔다.

그는 "나의 미래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아이를 낳고도 다시 경력을 이어갈 수 있다는 확신이 있는 사회를 만들고 싶다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1년 국내 경력 단절 여성은 145만 명에 육박했다. 그중 경력단절 사유로 '육아'를 꼽은 사람은 43%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출산과 육아를 계획하고 있는 여성들이 경력 단절을 고민하는 건 우리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일이 되어 버렸다.

오승미씨는 경력 단절을 겪고 있는 여성들에게 '할 수 있다'는 말을 건네고 싶다고 했다. 오씨는 "재취업을 위해, 또 제 2의 인생을 위해 다시 사회로 나왔으면 좋겠다"며 "우리는 충분히 다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동안 숨겨져 있던 재능을 꺼내 조금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되자"며 진심을 건넸다.

김세인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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