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은 어떻게 인간을 파괴하는가

입력
2022.02.19 10:00
19면
<75> 애플TV플러스 '체리'

편집자주

극장 대신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 작품을 김봉석 문화평론가와 윤이나 작가가 번갈아가며 소개합니다. 매주 토요일 <한국일보>에 연재됩니다.


운명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대학의 같은 수업에서 만나지 않았다면, 체리와 에밀리는 보통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을까. 시간여행을 다룬 SF에서 종종 나오는 설정은, 구체적인 사건이 바뀌어도 결국은 큰 틀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다. 체리와 에밀리가 대학에서 만나지 않았다 해도, 어딘가에서 다시 만났을 것이다. 길을 지나가다가 얼굴을 마주친 순간 반했을 수도 있고, 우연히 극장 옆자리에 앉았을 수도 있다.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고, 만나야 할 사람들은 만나게 된다. 운명이 아니라도, 그들만이 만들어내는 이야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체리는 수업 시간에 에밀리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들킨다. 수업이 끝나고 걸어가던 체리에게 에밀리가 말을 건다. 체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던 여자 친구가 있었고, 잠시 대화를 나누고 헤어진다. 그런데 친구의 하우스 파티에서 두 사람은 우연히 다시 만난다. 그러곤 바로 사랑에 빠진다. 순식간에 사랑하게 된 체리와 에밀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난관을 겪는다. 에밀리가 몬트리올에 유학을 간다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이별 통고 아니 배신에 분노한 체리는 홧김에 군대에 들어간다.


'체리'를 만든 감독은 루소 형제. 슈퍼히어로 영화인 동시에 뛰어난 첩보영화로도 평가받은 '캡틴 아메리카: 윈터 솔져'를 연출한 루소 형제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 이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와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만들어 '인피니티 사가'의 종막을 화려하게 장식했고, 스타 감독이 됐다. 루소 형제는 마블 영화를 연이어 만들면서 넷플릭스 '익스트랙트'의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하는 등 활발히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 올해도 넷플릭스에서 공개될 액션 대작 '그레이맨'을 연출했다.

체리를 연기한 톰 홀랜드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에서 루소 형제와 만났고 '어벤져스'에도 출연했다. 톰 홀랜드는 '스파이더맨 홈커밍' 3부작에 출연한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가 대표 캐릭터다. 지난해 출연한 넷플릭스의 '악마는 사라지지 않는다'에서는 미국 중동부의 시골에서 끔찍한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 어빈을 연기했다. 최연소 슈퍼히어로인 스파이더맨으로서 매우 힘들지만 언제나 활기차고, 건강하고, 선함을 잃지 않는 피터 파커와 어빈의 거리는 태양과 명왕성의 거리처럼 아주 아주 멀다. '체리'의 주인공 체리는 어빈에 가깝다. 전쟁에서 끔찍한 지옥을 만났고,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에 시달리다가 마약중독에 빠져든다. 피터 파커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아니 스스로 들어간다.


니코 워커의 소설이 원작인 '체리'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5부 구성으로 되어 있다. 프롤로그가 시작되면 추레한 옷을 입고 걸어가는 체리의 독백이 흐른다. "나는 스물세 살이지만 아직도 사람들이 뭘 하는지 모르겠다. 세상의 모든 것은 무형의 존재 위에 세워진 것 같고, 이 모든 걸 지지해 주는 건 아무도 없다." 1부 '삶이 시작되었을 때 너를 봤다'는 에밀리와 체리의 사랑 이야기다. 이별 통고를 한 에밀리는 체리를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 그게 두려워서, 너무 사랑에 빠져드는 것이 무서워서 도망치려던 것이었다. 에밀리의 진심을 들은 체리는 다시 사랑이 불타오르고, 밤을 지새우고, 아침이 되자마자 시청에 달려가 결혼을 한다. 두 사람의 사랑은 유지됐지만, 체리는 여전히 군대에 가야만 한다. 이미 입영 신청을 한 상태에서 취소가 불가능했던 것인지, 체리는 그대로 신병 훈련소로 향하고, 2년간 전쟁터에 가게 된다.

2부는 훈련소, 3부는 전쟁터다. 전쟁은 아수라장이다. 체리가 알고 있던 세계와는 모든 것이 다르다. 차를 타고 지나가면 아이들이 몰려들어 손을 벌린다. 초콜릿이나 과자, 전투식량을 던져준다. 한 소녀는 늘 남자아이들에게 밀려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체리는 소녀를 가까이 불러 먹을 것을 안겨준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달려들어 소녀를 밀치고, 때리고, 음식을 뺏어간다. 체리는 차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대학 때까지 체리가 알던 세상이 오히려 환상 같았다. 어느 날, 선임의 멍청한 판단과 명령 때문에 허허벌판에 고립상태가 되고, 적의 공격을 받아 눈앞에서 동료들이 죽어버린다. 그 차에 체리가 타고 있었다면 함께 죽었을 것이다. '갑자기 흥미로운 게 다 사라져버렸다.'


'체리'는 베트남전을 다룬 영화들을 떠오르게 한다. 훈련소 장면을 보면서 '풀 메탈 자켓'이 떠올랐고, 전쟁의 후유증 때문에 괴로워하는 체리를 보며 '디어 헌터'를 연상했다. 전쟁은 과거에 끔찍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2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후에도, 체리의 모든 삶을 옭아맨다. 체리는 매일 신음을 하며 악몽을 꾼다. 에밀리가 함께 있어도 소용없다. 이제는 전장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그의 정신은 전쟁터에 널브러져 있다. 체리는 정신과에 가서 처방받은 옥시코돈에 중독되고, 헤로인과 다른 약물들에 점점 빠져든다. '그리고 나는 내가 봤던 비참하고 끔찍한 인간이 되어 있었다.'

5부의 제목은 '약쟁이 생활'이다. 체리는 완전히 중독자가 됐고, 피폐해진 체리에게 화를 내다 슬퍼하다 했던 에밀리는 함께하는 길을 택한다. 지옥으로 가는 길일지라도 동행이 있다면 즐거울 수 있을까. 에밀리는 일을 하면서도 틈만 나면 약을 맞는다. 함께 약을 맞고 황홀경에 빠져 있으면 모든 것에서 자유롭다. 복잡하고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도망칠 수 있다. 그렇게 끝없이 빠져든다. '서서히 자살인데 그게 마음에 들어.'


체리와 에밀리의 약쟁이 생활을 보고 있으면 막막한 기분이 든다. 잘못된 길이라는 것이 빤히 보인다. 그들이라고 모를까. 알면서도 그들은 마약에 취해버리는 길을 택한다. 어떻게든 현실을, 미래를 외면하면서 순간의 쾌락에만 몰두한다. 마약상이 잠깐 맡긴 약을 남용하면서 체리는 은행강도까지 하게 된다. 이제는 약쟁이만이 아니라 범죄자까지 된 것이다. 대런 아르노프스키의 '레퀴엠(2002)'이 겹쳐졌다. 마약에 빠진 젊은 부부, 가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모습을 처절하게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레퀴엠'은 암울한 결말 때문에 보고 나서도 암울한 여운을 한동안 떨쳐낼 수 없었다.

'체리'는 마치 약쟁이의 넋두리 같은 영화다. 5부를 보면서 내내 궁금했다. 과연 이들의 행각은 어떻게 끝날까. 하나가 죽을까, 아니면 둘 다 죽을까. 체리가 에밀리를 만나지 않았다면, 체리는 군대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군대에 가지 않았다면 PTSD에 괴로워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약물 중독에 빠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운명이었을까. 어떤 운명이 다시 이끌어준다면, 새로운 길이 시작되지 않을까.


하지만 '체리'는 운명을 다루는 영화가 아니다. 힌트를 준다면, '체리'는 해피엔딩이다. 운명이 체리를 이끄는 대신, 어느 순간에 체리는 자신의 '다른' 미래를 택한다. 트라우마도, 지금 나를 괴롭히는 무엇도 결국은 직면해야만 벗어날 수 있다. 극복이나 이기는 것이 아니라도 지금과 다른 길은 항상 존재한다. 전쟁터에서 망가지고, 돌아와 마약에 빠지는 체리를 보면서 너무나 마음이 무거웠지만 결국 '체리'는 희망을 말한다. 우연히 찾아온 운명이 아니라, 체리가 강하게 움켜쥔 새로운 삶과 미래다.

김봉석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