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Fear Is The Mind-Killer)."
이 대사는 영화 '듄(Dune·2021)'의 인상 깊은 한 장면에서 등장한다. 프랭크 허버트의 1965년 출간된 원작을 바탕으로 제작된 이 영화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소년 주인공이 우주를 배경으로 오이디푸스적 분투를 벌이는 내용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남자'애'는 격렬한 성장통(몽정)을 이제 막 겪었으며, 섹시한 '알파 메일(우월한 남성)'인 아버지와 너무 일찍 경쟁해야 하고, 그 때문에 함부로 방문을 열고 들어온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린다. 거친 요약을 용서해주길. 물론 이것은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동원된 비유다.
앞서 인용된 대사는 두렵고도 신성한 마녀 종족, '베네게세리트'인 외할머니가 주인공인 손자의 능력을 시험하는 장면에서 강렬하게 각인된다. 그녀가 내민 작은 상자 안에는 손끝에서부터 지글거리며 타오르는 고통의 불길이 있다. 상자 안에 손을 넣지 않으면, 그리고 작은 신음 소리라도 낸다면 목에 겨눠진 송곳이 주저 없이 주인공을 꿰뚫을 것이다.
마법의 힘으로 조작된, 그러나 그 순간만큼은 너무나 '진짜'인 격렬한 고통을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다.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은 엄마는 문 뒤에서 눈물로 기도문을 외운다.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 두려움은 완전한 소멸을 초래하는 작은 죽음이다. 나는 두려움에 맞설 것이며 두려움이 나를 통과해서 지나가도록 허락할 것이다… 두려움이 사라진 곳에는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오직 나만이 남아 있으리라."
시쳇말로 '정신승리'라고나 할까? 살불살조(殺佛殺祖).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두려움을 만나면 두려움을 죽여라. 두려움을 죽인 자리, 즉 온갖 허상과 우상을 이겨낸 자리에는 '진짜 나'만 남을 것이므로.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베네게세리트'의 우월한 피를 이어받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소년은 외할머니의 시험을 통과한다. 짜릿한 장면이다. 동시에 나는 생각했다. 저런 세계관에서 나는 10초도 버티지 못하고 죽을 거라고. 그리고 내가 죽는다면 그건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목덜미를 송곳으로 위협하는 외할머니 때문이라고.
어쨌거나 '듄'을 보는 것은 황홀한 경험이었다. 나는 '듄'을 우회적으로 비난할 어떠한 사악한 목적 없이 이 글을 쓰고 있다. 그런 김에 조금만 더 물고 늘어져 보자. 애초에 왜 두려움과 맞서야 하는가?
두려움은 예측되는 위협에 대한 인간의 심리적·신체적 반응이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인간은 두려움이라는 반응을 통해서 위협과 맞설지 또는 위협으로부터 도망칠지를 결정한다. 따라서 두려움이란 우리가 무엇에 위협을 느끼는지 알게 해줄 뿐, 그 자체로 우리의 완전한 소멸을 초래하는 실체가 될 수는 없다. 설령 '고통 상자'의 불지옥이 허상일지라도 그 고통이 진짜인 이상, 인간은 두려움이 아니라 불지옥으로 인한 고통 때문에 죽을 것이다. 동물인 인간이 불을 두려워한다면, 거기엔 마땅한 이유가 있는 셈이다.
무엇보다 두려움은 인간 존재의 필수 요건이다.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말에 따르면 필멸자인 인간에게 "두려움(불안)은 생의 근본적 기분"이다. 위협 대상이 뚜렷한 공포 반응과는 달리 '기분'으로서의 불안은 마땅한 원인이 없다. 굳이 따지자면 인간이 태어나서 죽는다는 사실 자체가 원인이다.
삶이 불안의 근원이라면 아마 죽기 전까지 해소되기란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우리는 잘 알지도 못하는 세계에 던져져서 평생을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나를 둘러싼 세상이 나에 대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으니 두렵다. 그 때문에 '미움 받을 용기'까지 내가면서 세상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부터 해야 하는 것이다.
요컨대 속으로는 나를 싫어할지도 모르는 동료, 지금 하는 일이 끝나면 더 이상 나를 찾지 않을 것만 같은 일터, 장기 계획이라고는 없는 지출 목록과 교과서적 '생애주기' 항목들을 흘깃거리면서 정체 모를 불안에 사로잡히는 것은 지극히 '인간적'인 곤란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두려움은 이겨낼 수 없고 이겨낼 필요도 없는 필연적이고 유용한 감정인 셈이다. 그런데 왜 '듄'은 그토록 자주, 그리고 중요하게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는 대사를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듄'의 배경은 우주 식민지 건설이 가능해진 먼 미래다. 영화는 '아라키스'라는 사막 행성에서만 채취할 수 있는 값비싼 생명 유지 원료이자 막대한 부의 원천인 '스파이스'를 둘러싼 힘들 간의 싸움을 보여준다. 사막을 정복한다는 것은 스파이스의 생산과 판매, 유통에 대한 독점적 권리를 손에 쥔다는 것을 뜻한다.
주인공의 아빠인 레토 공작은 비장한 표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린 그동안 공군과 해군을 통해 지배했다. 아라키스에서는 사막의 힘을 길러야만 해." 영화에서 '사막의 힘'은 정복자들의 입을 통해 몇 번이나 반복해서 등장한다. 여기서 향신료 무역을 쟁점으로 삼은 유럽 제국주의의 역사나, 미국이 중동에서 벌이고 있는 '석유 전쟁'을 떠올리지 않기란 어렵다.
백인 남성 작가는 1960년대 '듄' 시리즈를 집필하며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라고 썼다. 그로부터 60년 뒤, 같은 대사를 영화 속에서 중성적인 얼굴의 주인공이 진지한 표정으로 읊는다. 자기가 정복해야 할 사막과 이미 사막에서 살고 있는 타자('프레멘')들을 눈앞에 두고서. 나름의 저항 세력을 키우고 있는 그들에게 '메시아'를 자처하며 먼저 싸움을 건 것은 자기 쪽이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은 채 말이다.
예언자적 환영 때문이든 부모의 기대 때문이든, 이제 주인공은 두려움을 극복하고 식민지 전쟁에서 승리해서 '선한' 착취자이자 정복자로 군림해야 한다. 그의 꿈에 등장하는 유혹적이고 냉혹한 여성 '프레멘'은, 완전히 죽이지 못한 그 자신의 두려움과 타자에 대한 매혹을 보여 주는 증거다. 결국 "두려움은 정신을 죽인다"는 자기 주문은 원활한 식민 통치를 위해 타자에 대한 두려움을 마취시키는 '차안대'라는 결론이 가능해진다. 우주적인 규모의 '큰일'을 위해서 두려움은 통제되어야 할 성가신 방해물에 불과한 것이다.
두려움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듄'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두려움을 포함한 감정은 서구 형이상학 전통에서 언제나 정복해야 할 대상이었다. 플라톤은 감정을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에, 그리고 이성을 마부에 비유한 바 있다. 그는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감정-특히 두려움이 해당된다-을 길들여야 할 '나쁜 말'로 보고, 합리적인 이성이 이를 얼마나 잘 다스리느냐에 따라 영혼의 질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분노, 슬픔, 기쁨, 우울, 두려움 등의 '해로운' 감정들은, 한 사람이 보다 숭고한 영혼을 지향하는 데에 방해물로 지목되었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만 한다. 아니, 아예 감정을 뿌리 뽑을 수 있다면 더 좋고.
이처럼 '감정'의 특징인 변덕스러움과 미성숙함은, 극복해야만 하는 여성(타자)의 본성으로 간주되어 왔다. 이성적이고 공적인 것은 곧 남성적이고, 감정적이고 사적인 것은 곧 여성적이라는 공식은 비단 플라톤의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가 사는 남성중심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세상 속에서 '큰일'이 될 수 없는 잔여들이, 바로 여성(타자)이라는 감정적이고 사적인 '쓰레기통'에 쓸어 담기고 있는 것이다.
이제 숱한 자기계발서의 명령이 된 '감정 다스리기'는 생산성과 효율성을 강제하는 노동 시장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해 통제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잘 알려준다. 동시에 '감정 노동자'라 불리는 서비스직 종사자들의 압도적인 여성 비율과 그들의 낮은 소득은 '감정의 여성화'뿐만 아니라 '노동의 여성화'라는 현상의 지표이기도 하다.
'듄'의 세계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감정은 그저 관리하고 통제해야 할 대상에 불과한 듯하다. 이처럼 돈이 되고 말이 되는 일들만이 진지하게 다뤄지는 세상에서, 두려움 따위의 감정은 '해일 앞의 조약돌'과 같은 개인적인 사정에 불과할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을 모두 치워버린 세상은 두려워해야 할 타자인 '너'도 없으며 그러므로 '나'도 불가능한 세상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