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적 성차별의 물증은 차고 넘친다

입력
2022.02.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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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조적 성차별은 없다"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발언이 계속 논란이다. 성차별 현실에 대한 완전한 무지일까, 아니면 계산된 정치적 수사일까.

차별적 현실에 대한 근거는 각종 공식 통계자료가 차고 넘친다. 명색이 야당의 유력 대선후보인데, 성차별이 없다고 단언했을 리가 없다. 이 말이 나온 문맥과 그의 해명을 들어보니 '구조적 성차별은 없고 성차별은 이제 개인적 문제'라는 주장을 하고자 했던 것 같다.

그의 발언은 최대한 맥락을 고려해서 수용한다 해도, 성평등에 대한 인식에 커다란 장애가 있어 보인다. 만약 '구조적'이란 말을 '법·제도적'이란 말과 동의어로 보면, 호주제와 같은 차별적인 법·제도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한국 사회는 구조적 차별이 없는 것처럼 보이기 쉽다. 하지만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적 인정이 법·제도적 권리 보장만으로 이루어지진 않는다. 인정이론가인 악셀 호네트는 한 인간을 온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인정하려면, 사회적 권리에 대한 '권리 인정'과 더불어 사회적 노동에 대한 정당한 '가치 인정'이 뒷받침돼야 함을 강조했다. 여성 노동에 대한 한국 사회의 '가치 인정'은 성별 임금 격차 30.4%, 20년째 OECD 국가 중 임금 격차 1위라는 사실이 모든 걸 말해 준다.

남녀 간 평균임금 차이는 개인 능력에 따른 차이가 아니다. 여성이 주로 담당하는 돌봄 노동을 비롯한 재생산 활동의 사회적 가치 인정이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 결과이다. 인정 체계 자체가 여성에게 불리한, 명백한 구조적 차별인 것이다. '사회 구조'는 법·제도뿐 아니라 조직문화, 그 안에 스며있는 뿌리 깊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이를 규범화하는 일상의 수행성까지 포함한다.

차별적 법과 제도 없이도 차별행위는 가능하다. 그러니 법·제도만을 사회구조로 보겠다는 것은 사실은 구조적 차별의 피해자에 관심이 없다는 의미이다. 구조적 차별은 가해자 없는, 아니 사회구성원 대부분이 가해자인 피해이다. 사회 전체가 윤리적 책임을 져야 하고, 정치적으로 풀어나가야 하는 문제이다. 가해자 혹은 기득권자가 이런 부담을 피하는 고전적 방법이 차별당하는 현실을 개인적 문제로 치부하는 '개인화'였다. 바로 그런 이유로 정치는 개인적 문제처럼 오인식된 사안을 사회적 사안으로 상정해야 한다.

윤 후보의 성평등 인식의 요체는 구조적 차별은 없고, 현재의 차이는 경쟁의 결과일 뿐이라는 것이다. 구조적 차별을 고려하지 않은 절차적 공정을 내세우는 능력주의는 전형적인 기득권의 논리이다. 여기에 상당수 20대 남성이 민감하게 감응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물론 지금 매체를 통해 전달되는 '이대남'의 이미지는 대선 국면에서 과장된 측면이 많다. 얼마전 ‘이대남’의 안티페미니즘 경향에 반발하며 또 다른 이대남 그룹 '행동하는 보통 남자들'이 기자회견을 했다. 이들은 표를 얻기 위해 젠더 갈등을 부추기는 정치권을 비판하며 페미니즘에 호의적인 이십대 남자들도 있음을 강조했다. 그렇다. 문제는 이십대가 아니라, 남성이다. 이대남 프레임에 갇히면 여전히 한국 사회 곳곳에 잔존하는 구조적 성차별을 놓칠 수도 있다. 명백한 공식적 통계와 숱한 차별 피해자들의 아우성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는 듯 "구조적 차별은 없다"고 대선후보가 단언할 수 있는 사회. 여성 전체를 무시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이런 태도가 득표 전략이 된다는 것이야말로 여전한 구조적 차별의 생생한 물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박수진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