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제주시 조천읍 동쪽 끝, 올레 19코스 중간에 위치한 해변마을 북촌리. 인근 함덕해변이나 월정해변처럼 관광객들로 북적거리는 곳은 아니다. 한적하게 걸으면서 제주의 아름다운 바다 풍경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숨은 명소다. 올레길에서 한 발자국만 옮기면 아름다운 풍경에 숨어 있던 제주의 가장 아픈 역사인 4·3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2016년 12월에 완성된 '북촌마을 4·3길'은 70여 년 전 제주의 아픔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지역이다.
북촌마을 4·3길은 너븐숭이 4·3기념관에서 시작한다. 서우봉의 일제진지동굴과 몬주기알, 북촌환해장성과 북촌포구를 거쳐 낸시빌레, 꿩동산, 마당궤, 당팟 등을 거치는 6㎞ 코스다. 걸어서 약 2시간이 소요된다.
지난 8일 오전 북촌마을 4·3길의 출발지인 너븐숭이 4·3기념관을 찾았다. 전시관에는 1949년 1월 17일 발생한 북촌리 주민 대학살 당시 상황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73년 전 그날, 북촌마을 어귀 고갯길에서 무장대의 기습을 받아 군인 2명이 숨지면서 비극이 시작됐다. 당시 사건의 보복으로 2개 소대 수준의 무장 군인들이 북촌마을로 몰려왔다.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북촌초등학교로 모았다. 군인들은 운동장에 모인 주민 1,000여 명 중 군인과 경찰 가족만 따로 분리한 후, 나머지 주민들을 몇 십명씩 끌고 나가 학교 인근 들판과 밭에서 학살했다. 이날의 대학살은 오전 11시쯤 시작돼 오후 4시까지 5시간 가깝게 이어졌다. 하루 희생자만 300여 명이었다. 이 때문에 매년 음력 12월 19일이면 북촌마을에서는 마을 전체가 제사를 지낸다. 전시관에는 당시 대학살의 참혹한 상황을 알려주는 주민 김석보씨 증언이 기록돼 있다. "동생들을 찾기 위해서 막 다녔는데 나중에 보니까, 저 소낭(소나무)밭에서 찾았어요. 막내 동생(당시 5세)은 총은 안 맞았지만 추워서 얼어 죽었어요. 둘째 누이동생(10세)은 가시덤불 위에 넘어져 있었고, 또 제 바로 밑 남동생(8세)은 이마에 총을 맞았어요. 손에 고무신을 쥐고, 그렇게 죽어 있었어요.”
주민 448명이 숨진 북촌마을은 4·3 당시 가장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지역이다. 대부분은 이념적으로 좌익도 우익도 아닌, 제주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군인들의 총에 쓰러졌다. 국제법상으로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는 집단학살이 북촌마을에서 벌어진 것이다.
너븐숭이 기념관을 나오자 바로 인근 조그만 빌레(암반지대) 언덕에 쓸쓸하게 보이는 애기무덤이 나타났다. 이곳에는 애기무덤 20기 정도가 있다. 이 중 10기는 4·3 당시 학살당한 아이들 무덤이다. 언덕 입구 쪽에 있는 돌탑 주면에는 누군가가 갖다 놓은 인형과 과자 등이 쌓여 있었다. 73년 전 제대로 묻히지도 못하고 세상을 등진 어린 영혼을 달래기 위한 마음이 고스란히 와 닿았다.
애기무덤을 뒤로한 채 10여 분 걸어가자 북촌마을 어귀에 도착했다. 마을 곳곳 담벼락에는 4·3을 상징하는 동백꽃 벽화가 탐방객들을 안내하고 있었다. 바다가 보이는 북쪽을 향해 걷다 보니, 완만하게 솟아오른 서우봉이 눈에 들어왔다. 서우봉 봉우리를 기점으로 동쪽은 북촌, 서쪽은 함덕리다. 서우봉을 중간쯤 오르니 해안으로 빠지는 숲길이 나왔다. 4·3길을 상징하는 붉은색과 하얀색의 띠가 매달려 있는 나뭇가지를 따라가자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20여 개의 진지동굴(등록문화제 제309호)이 해안가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길은 4·3희생터인 해안절벽 속칭 ‘몬주기알’까지 이어졌다. 절벽 아래 천연동굴은 4·3 당시 북촌주민뿐만 아니라 함덕주민들도 숨었던 장소다. 절벽 위에서 토벌대의 작전이 최고조에 달했던 1948년 당시 많은 주민들이 총살을 당했다.
서우봉을 내려와 다시 해안도로를 따라 걸으니 바다 한가운데에 조그만한 무인도인 다려도가 나타났다. 북촌포구에서 400m 정도 떨어진 다려도는 3, 4개의 바위로 이뤄졌는데, 매년 겨울이면 천연기념물 원앙이 찾아온다. 제주시가 선정한 비경 31곳 중 하나로, 일몰이 유명하다. 다려도를 바라보면서 해안도로를 따라가니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북촌환해장성을 거쳐 북촌포구에 들어설 수 있었다. 포구에서 만난 탐방객 윤창석(37)씨는 "올레길을 걷다 우연히 4·3길로 빠져 걷게 됐다. 솔직히 4·3사건은 교과서에서 봤을 뿐 별다른 관심이 없었고 내용도 잘 몰랐다"며 "하지만 북촌마을에서 벌어졌던 일을 듣고 나니 가슴이 먹먹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았으면 한다"고 말했다.
북촌포구를 떠나 마을 내 좁은 골목길을 거쳐 '낸시빌레'로 향했다. 북촌마을 청년 34명이 군인들에게 학살당했던 ‘낸시빌레’도 아픈 역사의 흔적을 안고 있다. 1948년 12월 16일 마을 청년들은 '무장대 협조 여부와 관계없이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군인들의 말을 믿고 군부대를 찾아갔다. 하지만 약속과 달리 7개월 전 열렸던 5월 10일 총선에 불참했다는 이유로 총살을 당했다.
낸시빌레의 아픈 기억을 뒤로한 채, 무장대의 무기 탈취 사건이 발생한 꿩동산을 지나, 마을제를 지내는 포제단에 이르렀다. 이어 4·3 당시 주민들의 은신처인 마당궤에 이르자 곧장 당팟이 눈에 들어왔다. 대학살 사건 당시 당팟에선 주민 100여 명이 숨졌지만 30여 년간 침묵을 강요당했다. 말 한마디에 ‘빨갱이’가 되는 세상에서 북촌주민들은 부모 형제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었다.
이들의 아픔은 1978년 가을 제주 출신 현기영 작가가 쓴 소설 '순이삼촌'을 발표하면서 드러났다. ‘순이삼촌’에서 비극의 장소로 묘사했던 너븐숭이기념관 인근 ‘옴팡밭’(땅이 오목하게 쏙 들어가 있는 밭)에는 순이삼춘 문학비가 들어서 있다. 북촌마을의 아픔을 느끼며 2시간을 걷자, ‘제주4·3희생자 북촌리 원혼 위령비’가 보였다. 위령비 뒤쪽에는 4·3 당시 숨진 436명의 명단과 함께 북촌학살을 잊지 않겠다는 현기영 작가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북촌마을 4·3길 문화해설사 이상언씨는 "4·3 당시 할아버지, 큰아버지, 고모를 한꺼번에 잃은 유족의 입장에서 4·3의 아픔을 더 잘 전달하기 위해 10여 년 전부터 해설사를 맡아오고 있다"며 "육지 사람들은 물론 4·3에 대해 알고 있다는 제주 사람들조차 북촌마을이 이런 피해를 입었는지 잘 모른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4·3길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제주와 4·3의 역사를 제대로 알고 느끼길 바란다"고 했다.
제주 4·3길은 북촌마을 4·3길을 비롯해 안덕 동광마을 4·3길, 남원 의귀마을 4·3길, 한림 금악마을 4·3길, 표선 가시마을 4·3길, 오라동 4·3길 등 도 전역에 걸쳐 6개의 길이 조성돼 있다. 각 길마다 북촌마을 같은 아픔의 역사가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