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원자력과 천연가스 발전에 대한 투자를 결국 ‘그린 택소노미(Green Taxonomyㆍ녹색분류체계)’에 포함시키기로 최종 결정했다. 최종안은 향후 4개월간 EU 의회에서 논의되며, 27개 EU 회원국 중 20개국 이상이 반대하거나, EU 의회의 과반이 거부하지 않으면 내년 1월부터 시행된다. 최근 원전을 '한국형 녹색분류체계(K택소노미)'에서 제외한 한국에도 적잖은 영향을 줄 것으로 보인다.
EU집행위가 2일(현지시간) 발표한 그린 택소노미 최종안에는 △2045년 전 신규 원전 건축허가를 받고 △이를 실행하기 위한 자금과 부지 계획을 제출하고 △2050년까지 방사성 폐기물을 안전하게 처분할 자금과 부지 등을 확보하면 해당 원전에 대한 투자를 ‘친환경 투자’로 분류한다고 명시했다. 기존 원전도 2025년부터 더 안전하다고 평가받는 핵연료(사고저항성 핵연료)를 사용하는 것을 조건으로 2040년까지 승인을 받으면 친환경 투자로 분류된다.
천연가스 발전에 대한 투자도 △전력 1킬로와트시(㎾h)를 생산할 때 나오는 온실가스가 270g 미만이거나 △20년간 연간 온실가스 배출량이 550㎏ 미만인 경우 △2035년부터 저탄소 연료나 수소로 전환할 경우 ‘녹색’으로 분류한다.
최종안은 지난해 12월 31일 공개된 초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이리드 맥기네스 EU 금융서비스 담당 집행위원은 “기후 중립으로의 힘든 전환을 위해 원자력과 천연가스가 어떻게 공헌할 수 있을지 제시한 것”이라며 “녹색분류에 포함되기 위한 조건을 엄격하게 제시했다”고 설명했다.
EU 안팎에선 비판이 쏟아졌다. 카를 네함머 오스트리아 총리는 이날 트위터에 “원자력은 친환경도 아니고 지속 가능하지도 않다”며 “EU의 결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도 “역사상 가장 큰 그린워싱(GreenWashingㆍ위장환경주의)’이라며 “친환경 정책을 주도해온 EU의 목표와 신뢰성을 크게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최종안이 부결될 가능성은 높지 않다. 반발하는 국가는 독일과 오스트리아, 룩셈부르크, 스페인 등에 불과하다. 프랑스와 핀란드 등 대부분의 EU 회원국들은 신재생에너지 수급 불안 등으로 전력난과 에너지 가격 상승에 시달리고 있는 데다가 러시아산 천연가스 의존도가 높아 에너지 안보 차원에서 원자력과 천연가스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미 일간 워싱턴포스트(WP)는 “신재생에너지로의 전환하기 전 ‘다리’ 역할로서 원자력과 천연가스 발전을 병행해야 한다는 회원국들의 지지에 기반해 최종안이 마련됐다”고 전했다.
최종안이 마련되면서 유럽 내 원전 부활 신호탄이 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1조 달러(약 1,360조 원)에 달하는 EU의 기후변화 대응 투자 예산(그린딜)을 신규 원전에 투자할 수 있고, 원전 기업들이 녹색채권을 발행해 더 많은 자금을 조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원전을 새로 지을 경우 막대한 비용 부담으로 인해 원전 확대로 이어지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유럽 기반 환경단체 ‘리클레임 파이낸스’의 폴 슈라이버 활동가는 “EU의 조건에 맞춰 원자력과 천연가스를 발전하려면 많은 재정 투입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신재생에너지에 비해 오히려 에너지 가격이 상승할 수 있어 최종안이 통과하더라도 원전이 크게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