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들리 스콧의 '아메리칸 갱스터(2007)'는 할렘을 장악한 흑인 갱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대담하게도 베트남에 파병된 군인을 매수하여 군용기로 헤로인을 들여와 뉴욕을 장악한 마약왕, 프랭크 루카스. 기존의 시스템을 뒤엎은 혁신과 도발로 기세등등한 이탈리안 마피아를 무력화시킨 프랭크는 20세기의 최강자 미국을 만들어낸 기업가들과 다르지 않았다.
실제 인물인 프랭크에게는 롤 모델이 있었다. 프랭크는 '할렘의 로빈 후드'라고 불렸던 범피 존슨의 운전기사였고, 경호원이었다. '아메리칸 갱스터'의 첫 장면은 1968년, 할렘의 주민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는 범피의 모습으로 시작된다. 범피는 프랭크와 함께 할렘 거리를 걸으며 많은 것이 변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범피는 프랭크가 이루어낼 변화의 끝을 보지 못하고, 급작스럽게 죽음을 맞는다. 범피 존슨이 주인공인 '갓파더 오브 할렘'은 '아메리칸 갱스터'의 프리퀄(전편보다 시간상 앞선 이야기)이라고 할 수 있다.
'갓파더 오브 할렘'은 1963년, 감옥에서 나오는 범피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범피는 마피아 누구의 이름도 밀고하지 않고 무려 11년을 복역했다. 범피의 출소를 축하하는 파티가 열린다. 모두 흑인이고, 누구는 새로운 사업 제안을 하고, 누구는 어떤 문제가 있다며 호소한다. '대부'의 첫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탈리아인의 모든 문제를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대부 돈 콜레오네. '갓파더 오브 할렘'의 첫 장면은 제목 그대로, 범피가 할렘의 대부임을 보여준다.
하지만 범피는 백인이 아니다. 흑인은 아직 미국의 시민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흑백 분리가 위헌이라는 대법원 판결이 1950년대에 나왔지만, 특히 남부에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어디에서나 인종차별은 극심했다. 피부 색깔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흑인은 2등 시민 취급을 당했다. 1964년 민권법이 통과되면서 흑인과 백인이 평등하다는 원칙이 공식화된다. 그러나 최근까지도 경찰의 흑인 구타, 총격 사건이 빈발했고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다. 1960년대 범피는 할렘 일부를 지배하고 있지만 마피아의 일원이 아니다. 범피는 이탈리아인의 조력자이며, 그들에게 마약을 공급받아 조직을 운영하고 있을 뿐이다. 마피아들이 모인 코사 노스트라에서 그는 영원히 부하이며, 외부인인 것이다.
돌아온 범피는 자신의 영역에 마피아가 침범했음을 알게 된다. 새로운 보스 빈센트 기간테가 할렘까지 확장한 것이다. 과거에는 흑인들의 거리에 관심도 없었지만, 할렘의 수익이 좋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탈리아인들이 욕심을 부리고 있다. 코사 노스트라의 중재역인 프랭크 코스텔로의 도움으로 일단 화해를 했지만, 범피와 기간테는 서로를 잡아먹을 기회만을 노리고 있다. 여기에 복잡한 문제가 하나 끼어든다. 기간테의 딸 스텔라가 흑인 뮤지션 테디 그린과 사랑에 빠진 것이다. 기간테는 스텔라 몰래 테디를 죽이려 하고, 범피는 테디를 보호하며 기간테에게 타격을 줄 방법을 찾는다.
'갓파더 오브 할렘'은 전형적인 갱스터물의 공식을 따라간다. 조직을 더 크게 만들기 위해 새로운 사업을 벌이고, 라이벌과 싸우거나 동맹을 맺는다. 마피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는 범피는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들어오는 마약을 직접 공급받으려 한다. 윌리엄 프리드킨의 걸작 영화 '프렌치 커넥션(1971)'의 소재였던 '프렌치 커넥션'을 독점하려는 것이다. 그러면 뉴욕만이 아니라 다른 10개의 대도시 할렘에 직접 마약을 공급하며 흑인들만의 '마피아'를 조직할 수 있다. 이탈리아인의 부하가 아니라 흑인들의 독자적인 조직을 세우는 것이다. '갓파더 오브 할렘'은 '프렌치 커넥션'을 따내기 위한 범피의 필사적인 투쟁을 보여준다.
그런데 범피 존슨은 갱스터 이전에 흑인이다. 당시 흑인들은 시민으로서 동등한 권리를 찾기 위해 싸우고 있었다. 범피는 돈과 권력을 얻었지만,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잘 알고 있다. 자신의 형제들을 외면할 수 없다. 실제 인물인 범피의 역사는 당대에 유명했던 흑인들과 겹칠 수밖에 없다. 흑인들의 무력 투쟁을 주장하다 암살당한 말콤 엑스와 젊은 시절부터 친구였고, 민권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투쟁한 아담 클레이튼 파월 하원의원, 세계를 뒤흔들었던 헤비급 복싱 챔피언 무하마드 알리(당시에는 본명 캐시어스 클레이를 썼다)와도 막역했다. 말콤 엑스, 파월, 알리와의 에피소드는 '갓파더 오브 할렘' 전체를 관통한다.
1963년 말콤 엑스는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 속해 있다. 탁월한 선동꾼이자 전략가인 말콤 엑스는 강력한 지지자들을 거느리고 있다. 파월은 의원이면서 기독교 목사다. 말콤과 파월은 다른 종교, 정치적 입장이지만, 흑인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손을 잡았다. 범피도 마찬가지다. 범피와 말콤은 최종적인 목적이 다르지만 당장은 힘을 합칠 수 있다. 그들의 공적은 이탈리안 마피아다. 말콤에게는 병력이 있고, 범피에게는 총이 있다. 기간테의 조직과 충분히 어깨를 견줄 수 있다. 마약을 모두 몰아내려는 말콤의 입장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범피는 거리의 약자들에게 측은지심이 있다. 자신이 흑인들의 대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신뢰하는 친구 말콤이 범피의 곁에 있고, 그들은 언제나 대화를 통해 손을 잡고 함께한다. 언젠가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싸울 것이라고 믿는다.
1시즌이 끝나면서 말콤은 네이션 오브 이슬람에서 정직을 당하고, 범피는 마피아에게 사형선고를 받고 쫓기게 된다. 말콤의 재능과 인기를 질투한 지도자와 동료들에게 배신을 당했다. 하지만 2시즌에서, 말콤과 범피는 역전의 기회를 잡는다. 1964년, 캐시어스 클레이는 소니 리스턴과 헤비급 타이틀 경기를 한다. 7대 1로 리스턴의 승리가 점쳐졌다. 그러나 모두의 예상을 깨고 클레이는 승리를 거둔다. 범피도 역전승을 거둔다. 흑인 친구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서로 죽이려 했던 기간테와 동맹을 맺는다. 이유는 간단하다. 범피와 기간테가 동맹을 맺는 것이 서로에게 가장 큰 이익이 되기 때문이다. 갱스터는 결국 비즈니스맨이니까.
'갓파더 오브 할렘'에서 범피 존슨의 캐릭터는 묘하다. 그는 갱스터이며 흑인이다. 많은 폭력조직이 소수민족, 소수자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다. 범피와 흑인도 같은 입장이지만, 그들은 결국 체제와 싸울 수밖에 없다. 2시즌의 중요한 테마는 민권법 통과다. 범피와 말콤, 파월 모두 손을 잡고 함께한다. 한걸음이 중요하다는 것에 동의하기 때문에 그들은 기꺼이 손을 잡았다. 그렇다면 말콤의 말처럼, 갱스터는 과연 정치적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범피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도 때로 탐욕에 눈이 멀기도 한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유리하게 살아가지만 때로는 스스로 좁은 길에 들어서기도 한다. 범피가 보여주는 길이다.
'갓파더 오브 할렘'은 흑인 갱스터의 아슬아슬한 투쟁을 보여준다. 철저하게 이익을 추구하는 갱스터이면서 흑인의 사회적 투쟁을 지지할 수밖에 없는 범피 존슨. 그리고 3시즌에서 그려질 1965년에는 말콤이 암살당한다. 가장 친했던 말콤이 죽은 후, 범피는 어떻게 되었을까. 너무 궁금해서 3시즌을 간절하게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