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북이 비로소 제 몸 누일 곳을 찾았다.
우리나라 동남단 동해 쪽으로 가장 뾰족하게 나온 대왕암 지척의 '바닷가 미술관'을 처소로 정한 이 거북은 166개 텔레비전 모니터로 이뤄진 대형 미디어 조각, 백남준의 '거북'이다. 1993년 독일에서 제작된 후 재미 사업가의 개인 수장고에서 숨을 고르던 걸 울산시립미술관이 제1호 소장품으로 데려온 것이다. '거북'이 그 위용을 드러낸 건 울산시립미술관이 개관을 준비하면서 수집한 국내외 미디어아트 대가의 작품 29점을 선보이는 '찬란한 날들' 전시를 통해서다. 거북이 엎드린 모양을 했다 해서 이름 붙은 '반구대'의 선사시대 유적 암각화를 품고 있는 도시 울산인 만큼 시립미술관 개관전의 얼굴로는 손색없다. 새 보금자리가 흡족한지 '거북'은 온 몸으로 현란한 이미지를 연신 번쩍거린다. 머리가 향한 동해로 금세 포복해서 들어갈 것만 같다.
'거북'을 위시한 '찬란한 날들' 전시가 열리는 곳은 폐교(옛 방어진중학교·울산교육연수원)다. 낡은 교사와 최첨단의 현대미술 미디어아트 작품들이 절묘하게 어울린다. 백남준, 세계적인 미디어아트 이론가이자 작가인 피터 바이벨, '비디오 그래피티'를 선보이는 인도의 날리니 말라니, 중국을 대표하는 송동부터 이불, 이용백, 문경원·전준호, 김윤철, 김희천 등 세계적 거장과 한국의 스타 작가를 아우른 울산시립미술관이 엄선한 미디어아트 컬렉션이 2개 동의 강당과 교실을 채우고 있다. "미디어아트 교과서"라 불릴 정도니 기회가 왔을 때 눈에 담아둬야 할 전시다. 이와 함께 울산에 연고가 있는 젊은 작가 24명의 작품전 '대면-대면 2021'도 같은 공간에서 열리고 있다.
울산 구도심에 위치한 울산시립미술관 본관에서는 3개 전시가 한창이다. 특히 미디어아트 전용관 XR랩에서 열리는 '블랙 앤드 라이트: 알도 탐벨리니'전은 울산시립미술관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XR랩은 20세기 미술관의 전형적인 전시 공간 형태인 화이트 큐브 개념을 지워버린다. 바닥을 포함한 사면은 온통 흑과 백으로 일렁인다. 백남준과 함께 비디오를 예술 매체로 사용한 최초의 실험 예술가인 탐벨리니의 유작인 10분 40초 분량의 비디오 작품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원주민이다'이다. 탐벨리니는 모든 것의 시작인 '블랙'과 에너지의 근원인 '라이트'의 시각적 조우를 통해 우주의 근원에 대한 통찰을 던진다. 음악, 무용, 영상, 시가 융합된 작품이다. 유난히 '인증샷'을 찍으려는 관람객이 밀려드는 곳이다. 서진석 울산시립미술관장은 "XR랩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등 실감 미디어 작업만 선보이는 전용 공간으로, 국내 국공립미술관 최초로 마련됐다"며 "우리 미술관은 '미래형 미술관'을 지향한다"고 했다.
개관특별전 '포스트 네이처: 친애하는 자연에게'에서는 영국 미술전문지 아트리뷰가 선정한 2017년 미술계 파워 피플 1위로 꼽힌 독일의 미디어아트 작가 히토 슈타이얼의 '이것은 미래다'와 백남준의 '케이지의 숲, 숲의 계시'가 눈길을 끈다.
지난달 6일 울산 최초의 공공미술관으로 문을 연 울산시립미술관은 산업도시 울산의 지역성과 자연과 인간의 공존, 산업과 예술의 융합 등을 기반으로 한 미디어아트 중심의 '미래형 미술관'을 표방한다. '문화의 불모지'라는 오명과 달리 지난달 28일 기준 3만2,335명이 다녀갔다. 일요일에는 3,000명 이상이 몰린다. 주요 전시는 4월 초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