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조업 사무직 직원으로 일했어요. 직원 100명이 넘는 큰 업체이지만 다른 분들은 다 현장에 나가니까 전 사무실로 출근을 하고, 그 사무실에서 저랑 할아버지뻘 되는 나이 많은 상사와 단둘이 일해야 했어요.
그날도 둘이서 업무를 하는 날이었는데 머리를 쓰다듬더라고요. 불편하다고 말하니까 "장난이야" "딸 같아서 그런 건데 예민하다"라고 했어요. 주변에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니 참을 수밖에 없었죠.
그러다가 회식 자리를 갖게 됐는데 온갖 음담패설을 자랑스러운 듯 계속 이야기하더라고요. 못 참겠어서 집에 가려는데 가지 말라고 계속 잡고, 그 실랑이를 하면서도 머리를 쓰다듬고 불쾌한 신체접촉을 했어요. 너무 기분이 나빠서 자리를 피하니까 또 "딸 같아서 그런다"고 하더라고요.
이 일이 있은 뒤로 고민이 많아졌어요. 그래서 주변 사람들한테 하소연했어요. "내가 예민한 거야?" 묻다 보니까 눈물이 흐르더라고요.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안 넘어가요. 무엇보다 전 일상이 이렇게 망가졌는데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그 상사의 모습이 화가 났어요.
그때 지인들이 증거를 남겨야 한다고 했어요. 마침 그 상사가 찔리는 게 있었는지 저한테 계속 연락을 해 오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전 제 피해 사실과 그날 있었던 상황, 불쾌했던 부분을 자세하게 적어서 문자를 보냈어요. 그랬더니 그 사람이 '내가 심했다, 미안하다'고 답장을 하더군요.
답장을 받아놓기는 했는데, 그다음에 제가 해야 할 일이 어떤 건지를 잘 모르겠어요. 문자를 주고받은 기록이 제 피해를 신고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상사를 처벌받게 하는 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지금 제 마음이 무너진 게 힘이 듭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황을 치유하고 싶은데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요?
A씨(20대 여성·제조업 사무직)
A씨와 같이 행위자와 단둘이 근무하게 되면 성희롱 피해가 있더라도 쉽게 이야기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증거나 증인이 없어서 신고조차 하지 못하고, 참다 참다 결국에는 퇴사하기도 합니다.
A씨의 경우 초기대응을 잘한 편에 속합니다. 행위자가 본인의 행위를 인정하는 증거를 확보한 셈이거든요. 언제 내가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적어서 연락을 하고 그에 대한 답장을 받는 건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럴 때는 해당 행위로 인해서 내가 너무 불쾌하고 불편했다고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게 좋습니다. 답장으로 "내가 언제 그랬어"라는 식으로 부정하는 답변이 올 수도 있지만, 최대한 피해 내용들을 남기라고 조언을 합니다. 직접적 증거가 아니더라도 정황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이니까요.
A씨는 증거 확보 측면에서 초기대응을 잘했지만, 이 증거를 가지고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를 몰라 당혹스러워하고 있습니다. 관련 법규가 분명히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피해 당사자가 되기 전까진 이런 일이 생길 거라는 예상을 전혀 못 하거든요. 어디에 어떻게 문제 제기를 해야 하는지, 그럼 난 어떤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우선, '남녀고용평등법' 내용을 인지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이 법은 직장 내 성희롱의 예방 및 처리에 관한 책임을 사업주에게 지우고 있으며, 각 의무 위반 시 처벌규정을 두고 있습니다. 사업주나 상급자, 근로자는 직장 내 성희롱을 해서는 안 되며, 사업주는 성희롱 예방 교육, 성희롱 발생 시 지체 없는 조사, 적절한 피해 근로자 보호 조치 등을 실시할 의무를 가집니다.
A씨가 피해를 알린 뒤 사업주가 어떤 조치를 취하느냐에 따라 법 위반 여부가 갈리기 때문에, 이 내용들을 숙지한 뒤 절차를 밟으시면 됩니다.
이제 정식 신고를 할 차례입니다. 직장 안에서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일단 근무 중인 업체가 직장 내 성희롱 구제 절차를 마련하고 있는지, 고충처리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존재한다면 담당자에게 알리면 되고, 관련 기구나 담당자가 없는 경우 우선 인사부서에 신고하기를 추천드립니다.
신고를 할 때에는 행위자의 행위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는 게 중요합니다. 신고 전 피해에 대해 일자별로 정리해 기록을 남기고 문자를 비롯해 확보된 증거자료를 문서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고충처리 신고 후 성희롱이 확인되면 행위자와의 분리조치나 유급휴가도 사업주의 의무입니다. A씨의 경우 업종 특성상 행위자와 단둘이 있을 수밖에 없는 환경이고 상사를 다른 곳에 보낸다고 해도 업무 중에 부딪힐 수 있어요. 분리조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을 우려가 있으니 유급휴가를 요청하는 게 현실적일 수 있습니다.
규정상 성희롱 피해로 인한 유급휴가 기간이 정해져 있지는 않아요. 회사 사정 등을 고려해서 어떤 곳에서는 사건 조사가 끝날 때까지 한 달 이상의 기간을 유급휴가로 부여하기도 합니다.
그다음은 절차가 제대로 진행되는지 지켜봐야 합니다. 행위자에 대한 징계도 피해 사실이 인정된다면 사업주가 의무적으로 해야 합니다. 만약 회사에서 법에 나와 있는 내용대로 처리를 하지 않는다면, 고용노동부에 사업주를 상대로 신고할 수 있습니다. 그럼 고용노동부가 해당 사건을 들여다보게 되고, 제대로 후속조치를 하라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도 이행하지 않는다면 과태료 등의 처분을 받을 수 있으니 사업주도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점, 꼭 기억하세요.
A씨는 사건 해결도 중요하지만 심리적 피해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직장 내 성희롱은 피해 그 자체만으로도 정신적인 불안감과 신체적 고통을 유발할 수 있습니다.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도 우울과 분노, 무력, 불안감을 경험하는 분들이 많아요.
피해를 입증해야 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당사자가 심리적인 불안감으로 중도에 포기하는 사례가 많은 게 사실입니다. 몸과 마음을 회복하고 사건을 대응해나갈 수 있는 힘과, 최종적으로 안전하게 직장에 복귀할 수 있는 심리 정서 치유가 중요한 이유입니다.
심리면에서 전문가 도움을 받으라고 말하는 건 피해 경험자들에게 '안정과 지지'가 상당히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피해 경험 자체에 매몰돼서 일상생활을 이어가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사건을 조금이라도 객관화하고 한 발짝 떨어져서 바라보려는 시도가 필요한 거죠. 게다가 사건의 주체가 돼서 해결해 나가는 힘을 키우려면 안정감을 느끼는 게 생각보다 많이 중요합니다.
고용노동부도 이런 문제를 알고 2018년부터 별도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고용노동부 산하 전국 21개 고용평등상담실에는 심리 정서 치유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민간의 전문적인 상담역량을 활용해서 직장 내 성희롱이나 성차별 등 피해를 입은 노동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선정한 민간단체들이죠.
상담실에서는 성희롱, 성차별뿐 아니라 출산휴가, 육아휴직, 부당해고 등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법적 권리를 안내하고 문제 해결방법을 자문해 줍니다. 단순 정보 제공뿐 아니라 트라우마 극복, 법률적 다툼 과정을 감당할 용기와 자존감 회복 등을 목적으로 특화된 심리상담 전문가가 최대 10회의 대면상담을 지원합니다. 연간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고용평등상담실의 상담을 받고 있습니다.
고용평등상담실 상담사들은 "법적 지식이 부족한 피해자들은 진정서 작성에도 엄청난 부담을 느끼지만, 전문가와 함께하면 신뢰하면서 용기를 낸다"며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 피해 노동자가 고통을 견디지 못해 회사를 그만둔 후에 찾아왔을 때"라고 말합니다. 심리적 불안정 때문에 자발적으로 그만둔 경우 분쟁과 소송에서 불리한 입장에 놓일 수 있기 때문에 그만두기 전에 꼭 상담부터 해달라는 당부죠.
지역별로 상담실이 운영되고 있으니 마음이 힘들 때 꼭 도움을 청하시고, 신고와 문제 제기를 결심한 것 자체가 대단한 한 걸음을 뗐다는 점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회사 생활을 하며 말 못 할 어려움을 겪고 있거나 해결책이 궁금하시다면 누구라도 제보를 해주세요. 이메일(119@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에 소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