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사는 변수빈(33)씨와 고윤희(44)씨는 '팩사냥꾼'이다. '팩사냥꾼'은 버려진 종이팩을 줍기 시작하며 수빈씨가 둘에게 붙인 별명이다. 한 명은 제주도의 동쪽. 나머지 한 명은 서쪽 끝에 살고 있는 터라 종이팩을 같이 줍지는 못하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그들은 '함께'다. '#(해시태그) 팩사냥꾼'을 통해 종이팩 분리배출을 인증하고 바른 재활용 방법을 알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SNS에는 '#종이팩은_종이가_아니다'라는 해시태그로 올바른 종이팩 재활용을 독려하는 메시지가 꾸준히 올라오고 있다.
경남 창원시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강혜주(39)씨는 지난해 1월부터 종이팩 재활용을 시작했다. 그의 SNS에는 '씻고 뜯고 말리는' 사진들이 가득하다. 우유팩을 재활용하기 위해서는 꼼꼼히 씻고, 평평하게 뜯어 물기가 남지 않게 말리는 과정이 꼭 필요하다. 종이팩 재활용률이 매우 낮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환경에 관심 있는 사람들 사이에선 일반 파지와 종이팩을 분리하고, 종이팩 안에서도 우유팩과 멸균팩을 따로 모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여기서 ①우유팩은 일반적으로 냉장 보관하는 우유팩 ②멸균팩은 상온 보관이 가능한 두유팩, 주스팩 등을 말한다. 실제로 환경부에서 발표한 '국내 종이팩 재활용 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 동안 종이팩 재활용량은 계속 감소했다. 2016년 25.7%였던 재활용량은 2020년 15.8%로 약 10%포인트 줄었다.
강씨가 종이팩 분리 배출을 시작하게 된 건 우연한 계기였다. 아파트에서 종이를 배출하는 날 우유팩이 많이 버려져 있는 걸 보았고, 아깝다는 마음이 들어 하나둘씩 가져오던 게 지금까지 이어졌다. 많을 때는 일주일에 100개 정도의 크고 작은 우유팩을 모았다. 혜주씨는 "버려진 종이팩은 참 다양하다. 뜯지 않은 채로 씻기만 한 것들도 있고, 아예 그대로 나온 것도 있다"며 "살고 있는 아파트 동에서 돌아다닐 수 있을 만큼 걸으며 종이팩을 모았다"고 말했다.
고씨는 커피 관련 일을 하며 올바른 종이팩 분리배출 방법을 알았다. 친한 카페나 커피 아카데미에서 나오는 우유팩을 모아 가기도 했다. "하루는 카페 사장님이 제가 종이팩을 가져가는 걸 보시고선 '우유팩은 그냥 종이로 버리면 되는 거 아니었냐'고 되물으신 적이 있었다. 그 말에 놀랐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잘 모르고 계셨다"며 "조금이라도 동참하는 분들이 늘었으면 좋겠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고 했다. 고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변씨에게 종이팩 재활용을 함께 하자고 제안했고, 변씨가 동참하며 한 팀이 되었다.
이들은 각자 집 주변의 카페에 방문해 종이팩을 모은다. 고씨는 "카페 사장님께 취지를 말씀드리면 다들 흔쾌히 우유팩을 내주신다"며 "카페에서 가져온 팩들을 씻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 재활용 도움센터에 가져다 준다"고 했다. 변씨는 "현재 센터에서는 우유팩만 받고 있고 멸균팩은 일반쓰레기로 처리한다"며 "멸균팩은 저희가 따로 제로웨이스트숍에 가져다 드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이들이 직접 돌아다니며 종이팩을 모아야 했던 건 '종이팩 수거함'이 따로 설치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강씨는 동네 주민들과 소그룹으로도 활동하며 '종이팩 수거함을 의무적으로 설치해 달라'고 경남도청에 민원을 넣었다. 찬반투표까지 어렵사리 갔지만 최종 답변은 현 제도 유지였다.
이후 강씨는 거주하고 있는 아파트에 종이팩 수거함을 만들어 달라고 건의했다. 아파트 측이 이를 받아들여 지난해 10월 처음으로 우유팩 수거함이 설치됐다. 아파트 관리사무소와 끈질기게 연락한 끝에 이룬 성과였다.
강씨는 "수거함이 잘 정착될 수 있도록 아파트 커뮤니티에 몇 달 전부터 계속 교육자료를 올렸다. 종이팩을 잘 자르고 말려서 내놓아야 한다는 영상자료였다"며 "주민분들께서 '(수거함을) 기다리고 있다'는 댓글도 많이 달아주셨다"고 말했다. "수거함 시행 초기에는 거의 매일 가서 이물질은 없는지, 올바르게 잘 배출되고 있는지 확인했다"고도 덧붙였다. 현재 강씨의 아파트에는 (우유팩들이) 대부분 깨끗하게 잘라져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강씨는 "종이팩 수거함 관리를 하며 수거 체계에 문제가 있음을 느꼈다"고 말했다. "현재 우유팩은 통이 다 차면 관리사무소에서 주민센터에 가져다 주고 있지만 멸균팩은 주민센터에서 받지 않는다"며 "쓰레기 처리 비용보다 재활용 비용이 더 많이 든다고 받지 않더라"고 덧붙였다. 모인 멸균팩은 강씨가 매주 가지고 와서 멸균팩 재활용이 가능한 제로웨이스트숍이나 생활협동조합 한살림에 가져다 주고 있다.
이 같은 문제 제기가 계속되자 지난해 11월 환경부에서는 종이팩 분리배출 시범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종이팩을 따로 재활용할 수 있도록 대상 지역에 종이팩 전용 수거함과 봉투를 나눠 주겠다는 것. 일반 우유팩과 멸균팩을 분리해 수거하겠다는 입장도 밝혔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전국 공동주택을 대상으로 사업 규모를 확대할 계획이다. 환경부는 "종이팩은 고품질의 펄프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화장지로 재활용할 수 있지만 재활용률은 16%에 불과하다"며 "일반 파지(버려지는 종이)와 함께 배출되며 재활용 과정에서 폐기물로 처리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혔다. 또 "멸균팩은 내부에 알루미늄박(포일)이 있어 우유팩과는 따로 분리되어야 한다"는 점도 강조했다.
환경부 발표에 대해 고씨와 변씨는 긍정적 반응을 보였다. 고씨는 "사람들이 종이팩과 일반 파지를 분리해서 배출해야 한다는 걸 알아가는 시작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변씨는 "그동안 해왔던 노력들의 효과가 눈으로 보이는 것 같다. 정책이 바뀌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다. 이런 변화가 있으면 활동하는 사람들에게 큰 동기 부여가 된다. 앞으로 이런 제도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언급했다.
강씨는 정책 홍보와 환경 교육을 더 활성화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재활용이 안되고 있는 근본적 원인은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며 "왜 재활용이 되어야 하는지 현재 실태를 알려주는 과정이 꼭 필요하고 올바른 재활용 방법도 함께 알려줘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