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차로바,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첫 여전사

입력
2022.01.27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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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전을 다녀와서

1913년 9월 4일, 모스크바 시내 한복판에서 괴상한 메이크업을 한 전위예술가들이 행진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거리는 호기심에 찬 군중의 웅성거림과 이들을 뒤쫓아가며 열띤 취재 경쟁을 하는 언론사 기자들로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마치 원시부족의 주술적 문양 같은 화장을 한 이들의 중심에는 나탈리아 곤차로바(Natalia Goncharova)가 있었다. 이 도발적인 퍼포먼스는 미술전시회를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32세의 곤차로바는 미하일 라리오노프(Mikhail Larionov)와 함께 1910년대 초반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의 대표적인 예술가로 자리매김했다.

곤차로바는 이미 러시아 국내에서 악명이 높았다. 위 누드 그림을 포함한 작품들이 당국에 압수되었고, 타락한 그림을 그렸다는 혐의로 재판까지 받았다. 당시에는 여성의 발가벗은 몸을 그리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곤차로바의 종교화 역시 교회를 분노하게 했다. 전통적 이콘화의 도상에 어긋난 그의 그림들은 신성모독으로 기소되었다.

사회 규범에 얽매이지 않은 곤차로바는 예술뿐 아니라 실제 삶에서도 파격적이었다. 19살에 만난 연인이자 예술적 동료였던 라리오노프와는 결혼하지 않은 채 동거했고, 한 남자의 아내나 뮤즈 역할과는 거리가 먼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여성으로 살았다(말년에 현실적인 이유로 혼인신고를 했다). 전위영화에서는 젖가슴을 드러내고 출연할 정도로 자유분방했다.

당시 러시아는 서구에서 전제군주제와 농노제가 가장 오래 남아있었던 후진국이었지만, 낡은 것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회를 이룩하려는 혁명 세력이 열정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러시아 지식인들에게는 사회 변혁에 대한 강한 신념과 사명감이 있었다. 거리에서는 정치 활동가들이 투쟁했고, 예술가들은 예술을 통해 혁명에 참여하고자 했다. 이 격동의 시기, 곤차로바는 구시대의 관습과 규범을 깨부수기를 원했고 전통적인 성 역할을 거부했다. 예술에서도 자유와 혁신을 추구하며 아방가르드 운동의 최전선에 섰다.

곤차로바의 작품들은 어느 하나의 이즘(ism)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의 스타일은 후기 인상파 풍경화에서 표현주의 경향의 신원시주의, 입체파, 미래파, 광선주의로 빠르게 변화되었다. 그중 라리오노프와 함께한 광선주의 운동은 타틀린의 구축주의, 말레비치의 절대주의와 더불어 러시아 아방가르드의 주축이었다. 활기차고 도전적인 성격의 곤차로바는 한 가지 양식에 묶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끊임없이 다채로운 예술 양식을 탐구했다. 곤차로바가 작업했던 예술 매체 역시 회화와 조각, 일러스트레이션, 패션 디자인과 무대 장식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 있었다.

특히, 곤차로바는 연극과 발레 분야의 디자인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림을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의 창조적인 에너지의 대부분은 무대 장식과 의상 디자인에 집중되었다. 1915년부터는 댜길레프(Sergei Diaghilev)가 파리에 만든 러시아 발레단 '발레 뤼스(Ballet Russe)'에서 발레 의상과 무대 세트를 디자인했다.

곤차로바는 러시아 정교회의 이콘화와 전통 판화인 루복(lubok), 나뭇조각, 도자기, 자수공예 등 민중의 소박한 삶과 신앙심이 담긴 러시아 민속미술에서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그의 작품세계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토착 미술과의 연관성은 곧 곤차로바의 정체성이었다. 발레의 무대 및 의상 디자인에서도 그 영향이 엿보인다. 그는 림스키코르사코프의 '황금 수탉(Le Coq d'Or)', 스트라빈스키의 '불새(L'oiseau de feu)'에서 선명하고 알록달록한 색상의 민속 스타일을 발레복과 무대 디자인으로 재창조해 큰 성공을 거두었다. 원시적인 순수함과 생동감 넘치는 색상의 의상과 무대 세트에 의해 왕, 마을, 거리, 전설이 화려하고 환상적으로 재현되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는 현대미술사의 중요한 한 축이다. 곤차로바를 비롯한 류보프 포포바, 올가 로자노바, 나데즈다 우달소바, 바르바라 스테파노바, 알렉산드라 엑스테르 등 젊고, 똑똑하고, 자유롭고, 반항적인 여성 미술가들은 20세기 초, 칸딘스키, 말레비치, 타틀린 등 남성 예술가들과 함께 러시아 아방가르드를 이끌었다. 당시 파리를 중심으로 한 서구 미술계에서 여성 예술가들이 차별받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러시아 여성 작가들은 혁명의 물결 속에서 남성들과 대등한 위치에서 작업했고 인정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가 직선적으로 진보한다고 생각한다. 2020년대의 우리가 100년 전의 러시아 아방가르드 미술가들보다 자유롭고 개방적일까? 곤차로바는 삶과 예술 모두에서 전통적 규범과 금기를 깬 거침없는 여성이었다. 낡고 익숙한 틀에서 자유로워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칸딘스키, 말레비치 & 러시아 아방가르드' 전에서 곤차로바의 그림들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지금, 여기, 나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김선지 작가·'그림 속 천문학' '싸우는 여성들의 미술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