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한복판에 한국전쟁의 상흔을 고스란히 간직한 마을이 있다면 믿기 어려울 것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오랫동안 비정부기구(NGO)에서 일해왔던 작가 김여정은 용산구 보광동의 한 골목에서 아직도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발견했다.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공격하던 기억, 폭격을 피해 달아나던 전쟁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보광동 토박이들이다. 작가는 2015년 겨울부터 보광동 골목에서 작은 카페를 운영하면서 기억들을 채집해 이달 논픽션 ‘우리가 서로를 잊지 않는다면’을 내놨다.
작가는 카페에서 우연히 전쟁의 기억을 만났다. 야트막한 건물들이 언덕에 둘러선 마을은 재개발 바람에 휩싸여 있었다. 반평생을 함께하던 보광동 토박이들이 하나둘 떠나면서 마을에는 빈집이 조금씩 늘었다. 그나마 서울에서도 저렴한 월세 때문에 떠나지 못하는 세입자들이 카페를 찾았다. 이들이 작가에게 상처를 보여주었다. 작가는 토박이들의 일상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을 별명으로 기록했다.
보광동에는 용산에서 미군과 일했던 사람들이 많지만 ‘양키스’ 할아버지는 특별히 영어를 잘했다고 작가는 전한다. 보광동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의 참상을 털어놨다. 함께 자랐던 친구와 형들은 좌익·우익 청년단으로 나뉘어 싸움을 벌였다. 인민군은 일대를 점령한 이후 ‘반동’이란 누명을 쓴 마을 사람들을 체포해 어딘가로 데려갔고 그들은 대부분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다 우익청년단원이었던 큰형이 미군의 폭격에 목숨을 잃었다. 양키스는 온전하지 못한 시신을 폐허에서 수습해 드럼통에 넣고 화장했다. 억척스럽게 살아남아 보광동 버스회사 이사라는 명함을 달았지만 전쟁의 기억은 악몽처럼 수시로 양키스를 찾아왔다. 환각에 시달려 소리를 지를 때마다 아내와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 그는 결국 버스회사 지분을 팔아치우고 인사도 없이 도망치듯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한국에, 보광동에 돌아온 것은 30여 년이 지난 이후였다.
양키스 할아버지의 어린 시절 친구인 ‘투덜이 스머프’도 카페 손님이었다. 그는 용산 폭격이 절정에 달했던 날을 아직도 기억한다. 전투기가 하늘을 뒤덮더니 용산 일대가 불바다로 변했다는 이야기다. 마을 사람들이 십자가가 높게 달려 있으니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피신했던 보광동 교회 역시 무너져 내렸다. 투덜이 스머프는 “용산에 장맛비처럼 폭탄이 떨어졌어”라고 털어놨다.
'보광동 언니'의 집도 잿더미로 변했다. 보광동 언니는 “한강에 빨래하러 나가는데 이 박사 처갓집 정찰기가 잠자리처럼 우르르 떠서 시끄럽게 소리를 냈어. (중략) 그러더니 B-29 폭격기가 무겁게 비행해왔어. 공습 사이렌이 울리는데 어디 피할 곳이 없었어. 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폭격기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데 동네 아주머니가 빨리 숨으라고 소리를 질렀어”라고 돌아봤다.
작가는 두 토박이가 증언한 1950년 7월 16일, 미군 B-29 폭격기 47대가 폭탄 1,504발을 용산 일대에 투하했다고 썼다. ‘큰 꽃언니’ ‘작은 꽃언니’ ‘막내 꽃언니’ ‘예천 언니’ ‘파주 언니’ ‘원주 언니’ 등 작가가 기록한 토박이들 가운데 많은 주민이 아직까지 비행기를 두려워한다.
보광동의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간다. 재개발 바람이 거세지면서 카페는 문을 닫았고 먼저 개발이 시작된 지역에서는 보광동을 지우고 한남동이란 지명을 앞세운다. 토박이들은 이주하거나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고 있다. 보광동이란 마을이 있었고 거기에 전쟁의 희생자들이 살았다는 사실이 세상에서 잊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이야기를 모으고 글을 썼다고 작가는 전했다.
“기록되지 않은 죽음과 상처들이, 그 고통스러운 역사의 증인들이 지금 여기에 있었다. (중략) 미군 기지가 들어서고 그 아래서 억척같이 살아남아 목소리를 내고 있는 이들의 삶을 기록했다. 그것은 전쟁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 영혼과 전쟁의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는 모두를 위해서라도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