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서 하지 않고 앉으면서 허리를 굽혀 머리를 조아리는 절'.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큰절'의 사전적 의미입니다. 땅바닥에 머리를 닿으며 건네는 이 깍듯한 인사에는 그만큼 상대를 향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겠죠. 명절 차례나 제사에서 조상이나 웃어른에게 큰절을 하는 건 전통 풍습이기도 합니다. 당장 이번 설 연휴에도 새해 평안과 건강을 기원하며 가족끼리 세배를 드리는 모습이 집집마다 펼쳐질 텐데요.
대한민국엔 이렇게 훈훈한 큰절 말고도, 절박한 큰절이 존재합니다. 선거 때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정치인들의 큰절입니다. "제발 한번만 기회를 달라"고 한 표를 읍소하는 사죄 퍼포먼스에서 큰절은 빠질 수 없는 이벤트죠. "잘못은 했지만, 뽑아는 달라"는 낯뜨거운 말도 큰절과 함께라면 자신있어 보입니다.
이번 대선 레이스에서도 큰절 경쟁이 불 붙었습니다. 역대급 비호감 대선을 이끌고 있는 거대 양당 후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번갈아 가며 국민 앞에 무릎을 꿇었는데요, 큰절이 등장하는 타이밍은 따로 있죠. 바로 지지율이 불안해질 때입니다.
최근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넙죽 맨바닥에 엎드렸습니다.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지지율 40%를 찍었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발표된 날이었죠. 좀처럼 허물어지지 않는 정권교체 여론을 달래기 위해선 석고대죄밖에 없다는 판단이었을 겁니다.
이 후보의 큰절은 벌써 두 번째인데요. 두 달 전,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의 컨벤션 효과로 지지율 격차가 벌어졌을 때도 이 후보는 고개를 바닥에 떨궜습니다. 당시 이 후보와 함께한 민주당 의원들은 큰절 없이 90도 허리만 굽혔지만, 이번엔 전부 다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만큼 절박해졌다는 얘기겠죠.
윤석열 후보도 새해 첫날 선거대책위원회 신년 인사자리에서 구두까지 벗어던지고는 바닥에 엎드려 큰절을 올렸습니다. 당시 국민의힘은 이준석 대표의 선대위원장직 사퇴 등 극심한 내홍으로 지지율이 크게 흔들리던 시기였죠.
큰절 정치의 효과를 두고는 평가가 엇갈립니다. 진정성 있게 반성하는 모습을 어필하면서, 잘못했던 과거와 단절하고 새롭게 출발하겠다는 다짐을 선보이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후보나 유권자 입장에선 변곡점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방점은 당연히 진정성과 변화겠죠. 용서를 빌긴 비는데, 무엇에 대한 사과이고 반성인지, 그래서 어떻게 달라지겠다는 건지 불분명하면 유권자를 우롱하는 보여주기 사죄쇼에 불과할 테니까요. 당장 동정심에 호소하는 표 구걸이냐는 비판이 뒤따를 겁니다.
위기모면용 신파정치냐, 진정성 담은 변화의 신호탄이냐. 선거철마다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는 정치인들의 처절한 읍소는 유권자들 마음에 얼마나 가닿았을까요. "잘못은 했지만, 뽑아는 달라"는 큰절의 정치학, 그 효과를 따져 봤습니다.
큰절로 표상되는 읍소의 정치는 보수정당의 전매특허였습니다. 그 시작은 박근혜 전 대통령으로 거슬러 올라가는데요. 2004년 4·15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은 벼랑 끝에 서 있었습니다. 대선자금 수사로 밝혀진 '차떼기당'이라는 오명과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강행에 대한 역풍으로 당 지지율이 10%대로 곤두박질칠 정도로 민심은 싸늘했죠.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근혜 대표는 취임 첫날인 3월 24일, 당 간판을 떼어 들고 여의도 MBC 건너편 '천막당사'로 향하며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국민 여러분께 지은 죄를 진심으로 참회합니다. 새 출발하려는 저희의 마음만은 받아주세요."
박 대표의 참회 여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는데요, 천주교 기독교 불교 3대 종교 기관을 돌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먼저 명동성당에서 주임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한 박 대표는 조계사를 찾아 '사죄의 108배'를 드렸죠. 당초 박 대표는 3,000배를 하려 했으나 주지인 지홍 스님이 "3,000배 약속은 나중에 정치를 잘한 뒤에 하는 게 좋겠다"고 만류했다죠. 박 대표는 이어 영락교회로 이동해 회개의 예배까지 드립니다.
선거의 여왕 박근혜의 힘이었을까. "열린우리당의 단독 개헌을 막을 수 있는 100석만 얻게 해달라" 호소하던 한나라당은 보수 텃밭인 대구·경북(TK)을 중심으로 지지세를 회복, 121석을 얻으며 참패는 피하게 됩니다. 큰절도 큰절이지만, 천막당사까지 치며 기득권을 내려놓겠다는 쇄신안에 민심이 조금이나마 눈길을 줬던 것이죠.
한나라당에서 옷을 갈아입은 새누리당은 2014년 6·4지방선거를 앞두고 또다시 읍소의 정치를 들고 나옵니다. 10년 전엔 박근혜 대표의 사죄 원맨쇼였다면, 이번엔 새누리당 전체가 나섰습니다. '우리 박근혜 대통령을 지켜달라'는 호소였죠. 세월호 참사 직후 치러진 선거. 재난 대응과 사고 수습 과정에서 국민적 분노와 실망을 안긴 박근혜 정부에 대한 심판론이 들끓자, 정몽준 서울시장 후보, 남경필 경기지사 후보 등은 서울역 광장에 엎드려 길바닥 큰절을 올립니다.
새누리당 지도부를 비롯한 소속 의원들도 광화문광장으로 뛰쳐나와 "도와주세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바꾸겠습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지원 사격에 나섰죠. 이들의 읍소는 정권심판론에 맞선 정권안정론이라는 명분으로 지지층의 결집을 불러왔고, 결국 광역단체장 선거 결과는 새정치민주연합 9, 새누리당 8. 대접전이 벌어지던 경기, 인천, 부산을 모두 지켜낸 새누리당의 선방으로 마무리가 됐죠.
그러나 읍소의 정치가 늘 통하는 건 아닙니다. 국민들도 한두 번은 속을 수 있지만, 그 이상은 용납하지 않거든요. 더욱이 무릎을 꿇을 때는 "잘하겠다", "도와달라"고 표를 구걸해놓고, 선거만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달라지는 게 없다면 유권자 입장에선 배신당했다고 느낄 수밖에 없겠죠. 쇄신이 담보되지 않은 읍소가 반복되면 역효과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요. 보수 정당이 2016년 총선,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까지 거듭된 읍소전략에도 내리막길을 걸었던 이유일 겁니다.
무엇보다 알맹이 없는 반성문, 진정성 없는 뒷북 읍소는 유권자들의 화를 더 돋우기 마련입니다. 박근혜 정부의 중간평가 성격이었던 2016년 4·13 총선. 선거 초반, 새누리당 의원들은 야당 심판론에 목청을 높였는데요. 공천 파동 등 각종 구태로 보수 텃밭에서조차 민심이 급속도로 악화하자, 대구 지역에 출마한 이른바 '진박'(진짜 박근혜) 후보들은 부랴부랴 단체로 무릎을 꿇고, "저희들에게 회초리를 때려 달라"며 뒤늦게 고해성사에 나섰죠.
태세전환이 너무 갑작스러웠던 걸까요. 선거 결과는 사실상 참패였습니다. 야권분열이라는 대형호재에도 새누리당은 과반(150석) 의석 확보에 실패, 87년 민주화 이후 보수집권당 최소의석(122석)을 얻는 데 그치며 원내 제1당 자리까지 내줬죠. 여소야대 정국이 펼쳐진 건 16년 만이었습니다.
2018년 지방선거, 2020년 총선도 다르지 않습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사태 이후 치러진 전국단위 선거에서 자유한국당, 미래통합당 간판만 바꿔 달았을 뿐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2018년 6·13 지방선거에서 최악의 성적표를 받아든 자유한국당은 국회 본청 로텐더홀에 무릎을 꿇고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며 석고대죄했죠.이후 당 해체에 준하는 쇄신작업에 나서겠다 했지만, 크게 기억에 남는 건 없었죠.
제대로 된 반성이 없으니, 대안을 기대하기도 어렵겠죠. 그로부터 2년 뒤 2020년 4·15 총선에서 미래통합당은 또 한번 당 차원의 '대국민 호소문'을 꺼내 들었습니다. 선거 초반 기세등등하게 정권심판론을 부르짖었지만, 선거 막판 위기감이 커지자 다시 읍소 전략으로 선회한 것인데요. 총선에 출마한 통합당 후보들은 전국 곳곳에서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죠.
서울 종로에 출마했던 황교안 대표는 15개 동네를 돌며 '큰절 유세'를 벌이기도 했는데요, 이런 말도 남겼죠. "자세를 낮추니 보지 못한 것들이 보입니다. 차가운 바닥의 온도가 온몸으로 느껴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탄핵 이후 4년 가까운 시간이 흘렀건만, 바닥 민심은 왜 이제서야 보이고, 정신은 왜 이제서야 드는 걸까요. 통합당이 큰절만 하다 끝난 21대 총선은 더불어민주당에 180석 거대 여당의 압승을 안겨주며 막을 내렸습니다.
국민의힘에 질세라, 최근의 큰절 정치는 더불어민주당이 도맡고 있죠. 대선 전초전 성격을 띤 지난해 4·7 재·보궐선거를 앞두고 이낙연 전 대표를 비롯한 지도부는 선거를 일주일 앞두고 읍소 전략을 꺼내 듭니다. "국민들 화가 풀릴 때까지 반성하고 혁신하겠다"며 고개를 숙였고, "다시 한번 민주당에 기회를 달라"고 간곡히 호소했지만, 민심을 뒤집기엔 역부족이었죠. 문재인 정권과 민주당의 내로남불과 위선, 부동산 값 폭등에 대한 분노가 단순히 말 몇 마디로 해소될 문제는 아니었으니까요.
여전히 호락호락하지 않은 민심, 어떻게 달랠 수 있을까요. "잘못했다"는 과거의 반성을 넘어서 "잘하겠다"는 미래의 약속을 보여주는 게 중요합니다. 누가, 어떤 잘못을 한 게 문제였는지보다 구체적인 반성문을 쓰고,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고쳐 바꿔 나가겠다는 것인지 비전과 의지를 담은 청사진을 내놓을 때, '큰절의 정치'는 표 구걸이 아닌 국민과 함께하는 약속의 징표로 기억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의미에서 2017년 1월 2일 국회에서 펼쳐진 때아닌 '맞절' 행사는 본보기가 되어줍니다. 용역회사 소속의 비정규직이던 국회 청소근로자들이 새해부터 국회 사무처 소속의 정규직이 된 것을 축하하는 자리였는데요.
"너무 늦게 국회 직원으로 모셨습니다. 앞으로 잘 모시겠습니다."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을 담아 우윤근 국회사무총장이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자, 행사에 참석한 200여 명의 청소근로자들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박수와 맞절로 화답하며 기뻐했습니다. 서로 고마워하며 맞절을 올리는 장면에 모두의 가슴이 따뜻해졌죠.
"잘하겠다"는 정치인의 큰절에 "잘했다"고 국민이 덕담을 건네는 모습을 새해에는 과연 볼 수 있을까요. 너무 큰 기대라면, 최소한 국민 앞에 석고대죄할 만한 일은 알아서 만들지 않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