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줄에 튕기는 라틴풍 멜로디. 아름다운 해변에서 마초미 가득한 루이스 폰시가 'Despacito'(천천히)를 부른다. 화면을 비스듬히 스치는 성모마리아 상, 2006년 미스 유니버스 줄레이카 리베라의 요염한 뒤태, 슬프도록 고운 색색의 빈민촌과 낙서, 레게톤을 추는 어두운 피부색의 사람들, 어두침침한 바에 난무하는 선정적인 몸짓. 우리 상상 속 중남미가 차고도 넘치게 화면을 메운다.
루이스 폰시, 랩을 맡은 대디 양키(Daddy Yankee), 줄레이카 리베라는 모두 푸에르토리코 출신이다. 푸에르토리코는 카리브에 있는 섬으로 유럽과 통하는 관문에 위치해 스페인 식민지 기간 전략적 요충지였다. 1898년 스페인이 미서전쟁에서 패하면서 미국의 속국이 되었고 오늘날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투표권도 없는, 어정쩡한 자치주로 남았다. 토착 원주민, 식민 시기 아프리카에서 유입된 노예와 유럽, 그리고 이후 미국 이민들은 따로 또 같이 인종과 문화의 혼종을 살고 있다.
20세기 이후 미국은 당근으로 어루꾀고 채찍으로 훌닦으며 중남미 큰형님 노릇을 해왔다. 그러나 큰형이 집안일로 분주한 사이 중국이 이 지역 새해를 가늠할 모양새다. 칠레가톨릭대학교 국제관계연구소는 환경변화로 인한 물 부족, 시위, 지역 내 이민, 지하경제 확산, 정치 양극화, 외국인 투자 감소, 국제사회에서 전략적 중요성 감소, 사이버 범죄 증가, 그리고 중국의 영향력 증대를 중남미 새해 키워드로 꼽았다.
중국은 그간 다각적 투자는 물론,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는 중남미 여러 나라에 백신 지원과 공동 생산 등 코로나 외교를 펼쳐왔다. 공짜는 없다. 중국의 백신 외교는 정치적 호의를 담보로 품고 있다. 중국에 막대한 부채를 진 국가들은 천연자원으로 상환액을 지불하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동안 기술과 자본 부족 등으로 해외 기업에 리튬 개발과 채굴을 맡기고 세금을 징수해 오던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는 국유화 혹은 직접 개발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그 배후에는 중국의 투자가 버티고 있다. 녹색에너지 전환의 열쇠인 리튬 최대 원산지, 남미 리튬 삼각지에 중국은 일찌감치 터를 닦았다.
그들도 노력한다. 중남미 여러 나라에 평등과 복지를 외치는 좌파 정권 붐이 불고 있다. 그러나 가고 싶은 길은 정답이 아니고, 세계의 흐름과 규칙이 있어 원하는 길을 택하기 어렵다. 인권, 환경, 원주민, 소수자 등 나라 상황은 여유가 없다. 지도자는 착하고 싶지만 굳건한 엘리트층의 벽에 부딪히고 국고는 복지를 펼칠 여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골드만삭스는 중남미 대부분, 특히 새 정부를 맞이할 칠레, 콜롬비아, 브라질의 재정난을, 유엔은 아이티,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니카라과의 극심한 식량난을 예측했다.
레게톤은 미국 힙합, 중남미와 카리브 음악, 자메이카 레게, 그리고 파나마 레게가 버무려져 탄생해 중남미는 물론 세계적 인기를 얻었다. 마약, 폭력, 빈곤, 사랑과 섹스, 레게톤의 가사와 춤은 자극적이다. 그러나 정작 레게톤의 인기는 젊은 비백인 남성을 범죄자로 낙인찍고 범죄와 마약을 레게톤 가수와 팬들의 탓으로 돌리던 90년대 푸에르토리코의 인종차별 담론에서 비롯되었다.
2022년, 중남미 15개국이 한국과 수교 60주년을 맞는다. 레게톤이 우리 눈에 경박해 보인다고 중남미 사람들이 속내마저 허술하다 치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불쌍한 사람에게 동전닢 던지듯 베푸는 협력이 아닌, 자원의 보고 중남미와 아픔을 보듬는 깐부가 될 전략을 천천히 마련하는 새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