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편지 그 후, 우린 또 한번 광기를 보았다

입력
2022.01.21 00:00
27면

한 여고생이 쓰기 싫은 군인 아저씨 위문 편지를 억지로 썼다. 그러다 보니 내용이 매우 '창의적'(?)이고, 본인의 의도와 달리 해석은 분분하고 반응은 요란하다. 편지의 전문을 보자.

"군인 아저씨 안녕하세요? ○○○입니다. 추운 날씨에 나라를 위해 힘써서 감사합니다. 군 생활 힘드신가요? 그래도 열심히 사세요.^^ 앞으로 인생에 시련이 많을 건데 이 정도는 이겨줘야 사나이가 아닐까요. 저도 이제 고3이라 뒤지겠는데 이딴 행사 참여하고 있으니까 님은 열심히 하세요. (군대에서 노래도 부르잖아요. 사나이로 태어나서 어쩌구)-지우래요. 그니까 파이팅~추운데 눈 오면 열심히 치우세요^^."

편지를 받은 군인은 군대 생활을 조롱하는 듯한 말투에 불쾌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군대 생활의 노고에 대한 최대치의 상찬으로 정형화된 위문 편지를 기대하고 보면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이 편지에서 발견한 주된 감정은 1) 쓰기 싫은 위문 편지를 쓰게 하는 학교에 대한 원망 2) 가기 싫은 군대 가서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하는 군인에 대한 공감 3) 군대 조직의 비효율성과 군대 생활의 무익함에 대한 확신의 순이다. 수신자에 대한 적극적 조롱의 의사보다 학교와 군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강하다. 세련된 언어로 표현하진 않았지만, 자신이 경험하는 위문 편지쓰기가 부당함을 인지하고 자신의 언어로 저항한 것이다. 이 정도면 한 어린 '깨발랄' 학생의 투정으로 웃고 넘길 일 아닌가. 따지자면 이 시대에 여고생에게 군 위문 편지를 강제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는가. 그건 역설적으로 여성을 자원화하는 폭력적인 전체주의적 국가동원의 잔재가 여전한 현실을 말해줄 뿐이지 않는가.

그런데 여고생의 편지 한 장에 온 나라가 들썩인다. 신상털기가 시작됐고 무시무시한 혐오 발언들이 쏟아진다. 당사자가 재학 중인 학교 인근의 한 학원장은 자신의 SNS에 "앞으로 B여고 학생은 가르치지 않을 것, 재원하고 있는 학생들도 전부 퇴원 처리를 하겠다"는 글을 올렸다. '같은 학교 다닌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퇴원을 결정한 행위에 '돈벌이를 포기한 구국의 결단' 같은 찬사의 댓글이 쏟아진다. '개인'의 사소한 행동을 문제 삼는 ‘전체’의 폭력이 광기 수준이다. 무엇이 이토록 그들을 화나게 했을까? 남성만의 성역으로 여성을 반쪽 국민 취급하는 가장 강력한 논거인 군대를 어린 여성이 조롱했다고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

'미투' 이후 우리 사회는 심각한 '백래시(backrash)'를 경험하고 있다. 특히 2030세대의 젠더갈등은 심각하다. 대선은 여기에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대녀'의 정치성향은 평소 진보적이다. '이대남'은 그 어느 시대보다 보수적인데, 여기에는 '이대녀'를 적대하는 젠더갈등이 촉매제로 작용한다. '이대남'은 '이대녀'가 싫어서 실제 정치 성향보다 보수당에 투표할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가 '이대남'의 이런 성향을 읽고 '여성가족부 폐지' 공약을 내놓았다. 아무런 전후 설명 없이 일곱 자의 글자로 던져진 구호 속에서 오로지 '폐지'라는 순수 파괴의 대상으로만 존재하는 '여성가족부'. 이것이 편지 쓴 소녀에게 가해지던 '묻지마' 집단폭력과 무엇이 다른가. 여성들이 광장에서 싸워 얻은 한 뼘의 진보를 현실 정치의 선거 공학 논리로 지우고자 하는 이 폭력적이고 퇴행적인 상황이 참으로 아쉽다. 대선까지 남은 기간 여성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실체적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박수진 법무법인 덕수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