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월 18일 문익환 목사가 생을 마감했다. 문 목사에게는 '늦봄'이라는 아름다운 호가 있었다. 여기서 봄이란 계절(春)이 아니라 '눈뜸'을 의미했다. '늦게 눈을 뜨고 세상을 늦게 보았다'는 자책의 의미가 담긴 아호였다. 그리고 먼저 깨닫고 행동했던 친구들의 뒤를 잇겠다는 다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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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목사와 시인 윤동주는 '조선을 밝힌다'(明東·명동)는 뜻의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나 함께 자랐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문익환은 1918년 6월 1일 생이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 이 둘은 장준하와 함께 평양 숭실학교를 다니며 벗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들 생의 마감은 민족의 역사와 함께 갈렸다.
윤동주는 해방을 여섯 달 앞둔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장준하는 박정희 독재에 맞서 '민주'와 '통일'을 외치다 1975년 8월 17일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했다.
고 장준하 선생의 죽음은 문익환을 민주와 통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재야인사로 이끈 계기가 됐다. 그는 1976년 '민주화만이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 3·1 민주구국선언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게 된다. 그의 나이 59세였다. 이후 18년 동안 여섯 번에 걸쳐 모두 11년이 넘는 옥살이를 했다. '늦봄'의 의미이자 다짐처럼 그는 '싸우는 목사', '꿈꾸는 운동가'로 생의 후반부를 치열하게 보냈다.
문 목사는 작고하기 다섯 해 전인 1989년 3월 25일에는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했다. 그는 북한 주석 김일성과 두 차례 회담을 하고 통일 문제 등을 논의했다. 정부의 허가 없이 입북한 것으로 남으로 돌아오자 곧바로 구속돼 징역 7년을 선고받았다. 국내 정국에 공안 한파를 몰고 온 그 일로 문익환 목사는 일부 동지들로부터 비판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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