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일 한국전력 사장이 협력업체 근로자 감전사에 고개를 숙였다. 지난해 11월 경기 여주시 신축 오피스텔 공사 현장에서 협력업체 화성전기 소속 근로자 김모(38)씨가 고압전류에 감전돼 숨진 지 두 달여 만의 첫 책임 인정이자 공식 사과다.
한전은 재발 방지를 위해 앞으로 작업자가 △전기가 흐르는 전선을 만지거나 △전주에 오르는 행위를 근절하겠다고 밝혔다. 이번 사고는 한전처럼 대기업이 하청업체에 사고 책임을 미루는 관행에도 경종을 울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정승일 사장은 9일 서울 서초구 한전아트센터 회의실에서 ‘협력사 직원 안전사고 관련 중대재해 재발방지 대책’을 발표하고 “앞으로 효율 중심에서, 안전으로 현장관리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또 이번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유족에게 "법적·도의적 책임을 다하겠다"며 위로를 전했다.
유족들은 김씨가 숨진 지 두 달이 넘어서야 한전의 책임 인정과 공식 사과를 받게 됐다. 앞서 김씨는 지난해 11월 5일 여주시 신축 오피스텔 인근 전봇대 위에서 절연장갑, 절연작업차 없이 홀로 전기 연결 업무를 하다 감전돼 숨졌다.
그간 한전은 "김씨의 작업 사실을 몰랐다"고 주장하는 등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를 취했다. 유족의 제보로 사고가 공론화된 후, 해당 공사가 한전 승인 없이 시작될 수 없는 공사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사고 당시 한전 직원이 현장에 있었다는 증언까지 이어지며 한전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됐다. 결국 정 사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출장에서 돌아온 지 사흘 만에 고개를 숙였다.
정 사장은 이날 “앞으로 전력 공급에 지장이 발생하더라도 감전 우려를 없애기 위해 정전 이후 작업을 확대하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공사 때마다 지역 일대가 정전되는 불편과 비용을 감수하고라도 안전을 우선해 작업하겠다는 선언이다.
그는 "전력 설비와 전기공사의 안전 패러다임을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전기 공급 일정이 지연될 수 있다”며 “안전은 무엇과도 타협할 수 없다는 원칙을 되새기겠다"고도 다짐했다.
또 “이번 사고를 계기로 3대 주요 재해로 꼽히는 △감전 △끼임 △추락 방지를 위해 실효적인 대책을 세우겠다"며 “안전 작업수칙 미준수 시 즉시 작업을 중지한 뒤 불안전 요인을 해소한 후에 작업을 재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한전은 우선 전기가 흐르는 전력선에 작업자가 직접 접촉하는 '직접활선' 작업을 완전 퇴출한다. 2018년부터 전기를 끊고 작업하는 '간접활선'으로 전환 중이지만, 여전히 약 30%의 현장 작업은 직접활선으로 진행되고 있다.
또 추락 사고를 근절하기 위해 작업자가 전주에 직접 오르는 작업도 전면 금지하고, 모든 배전공사 작업은 고소작업차 사용을 원칙으로 하기로 했다. 현재 4만3,695개소 철탑에 설치된 추락방지 장치도, 당초 계획보다 3년 앞당긴 내년까지 모든 철탑에 설치할 계획이다.
모든 전기공사에 ‘1공사현장 1안전담당자’ 제도를 도입하고, 업체들의 불법하도급 관행을 막기 위해 사전 신고 내용이 실제 공사 현장과 일치하는지 확인하는 인력·장비 실명제도도 도입한다. 정 사장은 “불법이 발견되면 해당 업체에 페널티를 부여하고 반대로 무사고 달성, 안전 의무 이행 우수 업체 등에는 인센티브를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다만 이번 대책의 현실성은 의문이다. 직접활선 작업 폐지는 이미 2016년 발표된 내용인데다, 정전 후 작업 또한 전력이 끊기면 대규모 피해가 발생하는 산업체 입장에서는 민감한 문제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