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엔 '이게 무슨 소리지' 했다. 고요한 산 중턱을 푸르게 덮은 물 이불, 그 비취금에서 유영하는 구름의 몸짓에 눈이 홀려 잠시 귀가 먼 탓이다. 눈이 얼추 만족하자 귀가 다시 열렸다. 굳이 글로 풀면 '포닥포닥' '차르르' '찰랑' 소리가 아련하게 귀를 간질였다. 하늘을 가득 담은 물 위를 맴도는 작은 산새들의 날갯짓과 물장난 기척이었다. 대자연과 어우러진 소박한 인공 저수지가 막힘없는 운치를 선사했다. 심신은 평온에 잠긴다.
욕야카르타(족자)특별자치주(州) 구눙키둘 지역의 응랑그란(nglanggeran) 마을은 고즈넉했다. 마을 뒤로 솟아오른 절벽들이 설악산 울산바위를 떠오르게 했지만 장엄하기보다 정겨웠다. 비탈마다 비집고 들어선 계단식 논밭은 아기자기했다. 저수지로 오르는 길엔 아기 두리안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잠나파리(jamnapari) 품종의 염소들은 축사에서 여물을 먹고 있었다. 한국과 닮은 듯 다른 농촌 풍경이다. 무엇보다 마을은 탄성이 나올 만큼 깨끗했다. 세상 걱정 내려놓고 며칠 묵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당초 취재 계획은 없었다. 해발 495m에 위치한 저수지의 노을이 절경이라는 소문을 좇아 짬을 냈다. 요즘 시국에 여행 기사를 쓸 것도 아니고, 마침 다른 취재 동선과 겹쳐 홀가분하게 다녀올 생각이었다. 방문 일주일 전 유엔 산하 국제기구에서 생소한 발표를 하면서 일이 커졌다. 취재할수록 마을 풍경보다 뒷배경이 더 놀랍고 풍성했다. 기자로서는 행운, 관광객으로서는 불운이었다.
지난달 초 유엔세계관광기구(UNWTO)는 응랑그란 마을을 '제1회 최우수관광마을(Best Tourism Village)'로 선정했다. 전 세계 75개국 174개 마을이 참여해 32개국 44개 마을만 처음 누린 영예다. 최우수관광마을은 UNWTO가 농어촌 지역 불균형 및 인구 감소 문제를 관광으로 해소하고자 인구 1만5,000명 미만인 세계 각 마을을 평가해 인증서를 부여하는 사업이다.
국가당 최대 3개 마을만 추천할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에선 족자의 응랑그란 외에 명불허전 발리와 '지구상에 현존하는 가장 아름다운 섬 베스트 3' 롬복의 마을이 도전장을 냈다. 문화, 자연자원, 지속 가능성, 환경 보존 의지, 관광 잠재력, 안전 등 9가지 분야 평가에서 쟁쟁한 자국 경쟁자도 물리친 셈이다.
애초 관광 개념조차 몰랐던 주민들이 10년 넘게 차곡차곡 쌓은 성취는 더 있다. 2017년에는 동남아시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의 공동체 기반 관광마을 최고상을, 이듬해에는 지속가능관광대상(ASTA)을 받았다. 2019년에는 '세계 100대 지속가능관광지'에 뽑혔다. 인도네시아 정부가 준 상도 여럿이다.
500여 가구 5개 촌락으로 구성된 마을 곳곳을 살펴 보니 국제적인 수상에 걸맞게 잘 정돈돼 있었다. 농사 짓기, 염소 키우기, 초콜릿 만들기, 전통 악기 및 무용 배우기 등 다양한 생태 관광 체험시설은 깔끔했다. 구름 위 세상이 펼쳐지는 푸르바(purba) 사화산 정상, 푸른 논밭과 어우러진 크둥칸당(kedung kandang) 폭포 등 마을을 둘러싼 자연 풍경은 명승이었다. 두리안 농장을 조성하기 위해 만든 3,200㎡ 넓이의 중턱 저수지는 화룡점정이었다.
응랑그란이 속한 족자특별자치주는 세계적인 관광지다. 동쪽과 서쪽에 각각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힌두교 사원 프람바난과 불교 사원 보로부두르를, 북쪽에 므라피 화산을, 남쪽에 인도양을, 중앙에 술탄 왕궁을 품고 있다. 반면 응랑그란은 수도 자카르타에서 동남쪽으로 560㎞, 족자 시내에서 26㎞ 떨어진 두메산골이다. 대부분 마을 주민은 그저 농사로 연명하거나 일부 청년은 이역만리로 나가 돈을 벌어야 했다. 가난에 짓눌려 관광은 한가한 딴 세상 얘기였다.
지긋지긋한 가난이 세계 으뜸 관광마을을 일궜다. 아름다운 역설이다. 더구나 한국과의 깊은 인연이 변화의 원동력이다. 한국 정부나 기업의 직접 지원을 받은 건 아니다. 오롯이 마을 주민들이 스스로 해냈다. 그런데도 주민들은 한국을 은인의 나라로 여긴다. 한국을 모범으로 삼은 덕에 이룬 결실이라는 것이다.
사연의 중심엔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온 마을 청년들이 있다. 한국에선 '외국인 노동자'라 불린 이방인 신세였던 이들은 고국에서 관광 전도사로 거듭났다. 귀국 시점이 각기 다른 25명의 청년은 15년 전부터 마을에 한국을 심고 있다. "땅을 갈지 않고 어떻게 식구를 먹이냐"고 타박하던 주민들은 청년들이 이뤄낸 변화에 차츰 수긍했다. 뜻을 같이 하는 주민은 현재 140여 명으로 늘었다.
관광마을 사업 지도자 트리야나(43)씨는 "비극이 잉태한 사업, 처음엔 욕 먹는 게 일이었다"고 고백했다. "한국에서 겪은 우여곡절도 많다"고 했다. 그가 저수지 전망대 평상에 앉아 털어놓은 얘기를 전한다.
-한국에선 언제 일했나.
"2000년부터 5년간 일했다. 처음 3년은 경남에 있는 공장에서 근무했다. 한국산 자동차 스피커를 만들었다. 이후 서울에서 일했다. 내가 일하는 공장들이 성장하고 직원들이 많아지는 걸 보면서 뿌듯했다. 정해진 기간만큼 일하고 돌아왔다."
-한국 생활은 어땠나.
"월급 100만 원을 떼인 적이 있다. 김 부장님(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이 돈을 주지 않고 출입국관리사무소에 불법 체류자라고 신고했다. 불법으로 체류한 적이 없고, 회사를 키우기 위해 열심히 일했는데 억울했다. 결국 돈을 받지 못했다. 김 부장님에게 전하고 싶다. 제가 고향에 돌아와서 전 세계가 인정한 최우수관광마을을 일궜다고."
-관광마을 사업은 어떻게 시작했나.
"2006년 마을이 속한 구눙키둘 지역에 지진이 발생해 수많은 사람이 죽고 터전을 잃었다. 재건 사업에 참여했는데 마침 한국에서 일하고 돌아온 동료들과 의기투합했다. 전주한옥마을처럼 근사한 관광마을을 만들고자 이듬해 사업을 시작했다. 시간이 오래 걸리는 관광지 단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종종 욕을 먹었지만 2011년 이후 관광객들이 찾아오자 분위기가 달라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전엔 연간 1만~1만2,000명이 다녀갔다."
-한국 생활이 사업에 도움이 됐나.
"관광마을 사업에 영감을 준 게 한국이다. 무엇보다 한국에서 얻은 세 가지 덕에 사업이 제대로 안착할 수 있었다. 한국인은 질서를 잘 지킨다, 시간 관념이 투철하다, 환경 보존에 힘쓴다. 한국의 어떤 관광지를 가도 부러웠다. 그래서 우리도 원칙처럼 저 세 가지를 지키고 있다. 그 결실을 지금 당신이 보고 있다." (그의 사무실에는 청소도구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역시 한국에서 일했던 에코(32)씨도 다른 자리에서 비슷한 얘기를 했다. "시간 약속과 질서를 잘 지키는 한국에서 배운 습성대로 실천했더니 관광객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 더 많은 사람이 찾아오게 됐다"는 것이다.
응랑그란에는 태국, 사우디아라비아 등 다른 나라에서 일하고 돌아온 주민도 많다. 그런데도 유독 한국에서 일했던 청년들이 한데 뭉쳐 마을의 변화에 앞장선 건 한국에서 얻은 동일한 경험이 긍정의 힘을 발휘했기 때문이리라.
자바어로 '(약속을) 어기다'는 뜻의 응랑그란에는 슬픈 전설이 내려온다. 수백 년 전 마을 주민들이 수확을 축하하기 위해 그림자극 와양 쿨릿(wayang kulit) 공연자(dalang·달랑)를 초청했다. 주민들이 인형을 망가뜨리려고 하자 달랑은 저주를 내려 주민들을 인형으로 만든 뒤 산에 버리고 떠났다.
마을의 배타적인 속성이 전설에 녹아 있다고 풀이하면 자국이, 동남아가, 전 세계가 인정한 관광마을을 조성한 현재의 변화는 놀랍다. 그걸 한국을 보고 듣고 느끼고 돌아온 청년들, 우리가 '외국인 노동자'라고 부르는 이들이 해냈다. 더 놀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