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 17일부터 3일간 열린 '드랙킹 콘테스트'(드킹콘) 5회는 '드랙X트랜스 이갈리아'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공식 트위터 계정(@dragkingcontest)의 설명을 보자. "11월 20일 오늘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입니다. 1998년 11월 28일 포비아에게 살해된 리타 헤스터를 추도하는 데에서 유래한 날인 오늘, 우리는 우리의 곁을 떠난 수많은 트랜스젠더 동료와 가족, 친구들을 돌아보고 기억하려 합니다. '드랙킹 콘테스트' 기획 및 제작진 일동은 잃어버린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마음으로, 제5회 '트랜스 이갈리아' 공연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실과 무력감 대신, 광기와 야망이 가득한 무대로 여러분을 찾아가겠습니다!"
드킹콘은 지난 1회부터 5회까지 '콘테스트'란 이름을 유지하고 있지만, 여기에는 어떤 경쟁도 없다. 경쟁은 자본주의에서나 하는 것이고 '우리' 퀴어-페미니스트들은 어차피 그런 세계관에서는 '도태'될 것이기에, 드킹콘은 '콘테스트'라는 이름 아래서 아무 경쟁 안 하기, 즉 일종의 저항을 하는 것이라고 보면 될까?
이처럼 드킹콘은 제목이 암시하는 형식을 꿋꿋이 배반하면서, 지난 3회부터는 기획의 힘이 보다 분명하게 느껴지는 공연을 상연해왔다. 3회는 '여성국극'의 재해석을 주제로 '춘향전'을 각색한 공연을 선보였고, 4회는 '드랙X남장신사'라는 제목으로 '선배' 퀴어들을 무대에 올려 세대 간 만남의 장을 만들었다. 이번 5회에서는 '이갈리아의 딸들'에서 차용한 단어인 '트랜스 이갈리아'를 통해 '슬픈 변태', 퀴어들의 공동 전선 그리기를 시도했다.
최근 페미니즘·퀴어 문화비평에서 널리 사용되는 용어인 드랙은 거칠게 말해, 세상이 그 사람의 성별에 기대하는 방식과는 다르게 자신을 표현하려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래서 드랙은 '남장여자' 또는 '여장남자'와 같은 이른바 '일탈적 취향'을 가진 소수자들로 쉽게 환원되는 경향이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드랙은 단순한 취향의 반영일 뿐만 아니라 성별 표현에 대한 창조적 해석이기도 하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여성스러움과 남성다움에 대한 표현 방식들을 재료로 전에 없던 젠더의 스타일을 발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드랙은 스테레오타입을 비판하는 문화적 실천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스테레오타입을 가지고 노는 유희에 가깝다. 이런 관점에서 드킹콘은 '괴상한 퀴어' 성별 표현, 그중에서도 다채롭게 '빻았고' 섹시한 남성성의 표현이 실험되고 상연되는, 해방적인 놀이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나는 드킹콘의 열렬한 팬은 못 되겠지만 삐딱한 관찰자쯤은 되는 것 같다. 지난 3년간 표를 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서 드킹콘을 열심히 보러 다녔다. 퀴어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그리고 뭔가를 보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공연을 보는 것은 마냥 즐거운 경험만은 아니었다.
우선, 외면하기 힘든 아마추어리즘의 흔적이 눈에 밟힌다. 이는 행동주의와 예술 그 사이에 위치하는 작업들에서 항상 감지되는 무엇이다. 그러나 이른바 '완성도' 또는 '퀄리티'가 떨어진다고 할 때 우리는 두 가지를 동시에 고려할 필요가 있다.
첫째, 이들 '활동가-예술가'들 중 대부분은 시간·인력·공간·예산 등의 자원을 넉넉하게 가져본 적이 없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둘째, 애초에 '퀄리티'란 누가 정한 기준인가? 남들을 평가할 수 있을 만큼 자비로운 사람들이 정하는 것 아니던가? 고로 이들의 기준에 적응해줄 필요가 없다는 것.
그러니 우리는 그림이나 조각의 재료에 대해 논할 때처럼, 이런 조건들을 드킹콘의 한계이자 가능성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 같다. 물론 젊은 드랙킹들의 푸닥거리에 가까운 과감한 자기 표현에는 끝내 익숙해질 수가 없을 것이다. 지나치게 살아있는 그들의 몸 앞에서 나는 어떤 반응도 할 수 없다. 노골적으로 살아있기.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공격이 아닌가?
이번 드킹콘은 매 회차 공연자들이 조금씩 바뀌었다. 내가 갔던 이튿날에는 아장맨, 서연, 페논, 안평, 잭스터 더 타코 마스터, 박에디, 색자가 출연했다. 각각의 공연자들은 진행자인 아장맨과 최예나의 능청스러운 소개 멘트에 맞춰 등장했다. 이번 드킹콘에서 특히 흥미로웠던 점은, 수어 통역사들이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에 공연자들과 함께 올랐다는 것이다.
한국농인LGBT설립준비위원회의 멤버인 우지양, 김애란, 파파, 김보석, 진영은 공연자들과 마찬가지로 드랙을 하고, 진행자들의 말과 가사가 있는 곡의 수어 통역을 진행했다. 공연 중 한 수어 통역사는 시종일관 무표정하게 절도 있으면서 우아한 수어-퍼포먼스를 선보였는데, 마치 '보깅 댄스'(드랙 문화에서 유래한 춤의 한 장르)처럼 보였다.
지하에 있는 클럽이 아니라 공연장에서 드킹콘을 보는 경험은 새로웠다. 공연이 시작되자 역시나 몇몇 공연자들이 내가 그다지 반기지 않는 '날것'의 공연을 펼쳤다. 보는 사람이 보여지는 사람의 존재감을 고스란히 떠맡아야 하는 그런 종류의 공연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퀴어-페미니스트의 하위문화에서, 공연자와 관객은 함께 성장해야만 하니까. 겨우 한 줌인 우리는 서로의, 무엇보다 자기 자신의 미숙함을 견뎌야만 한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나는 그날 모든 것을 어렵지 않게 용서할 수 있었다. 이러한 너그러움은 공연자의 '일침'으로 인해 얻은 교훈 덕분이기도 하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연기한 안평은 스탠드업 코미디의 형식으로 '내부자 유머'를 구사했다. 퀴어들은 각자 자기 말만 하고 싶어 해서, '정상 사회'에서는 마땅히 위로 또는 걱정의 대상이 되는 커밍아웃의 사연을 매우 지루해한다는 얘기였다.
짐짓 점잔을 빼고 있는 나에게도 해당하는 이야기였다. 잘 웃었다. 열렬히 소리를 지르고 사람들을 얼싸안고 싶다는 불가능한 소망이 슬슬 피어올랐다. 비교적 적은 수의 관객이 의자에 앉아서 박수를 치며 '감상'할 수밖에 없는 시국 탓에, 공연마다 예상만큼 크지 않은 호응이 답신처럼 돌아왔다. 내 마음은 그게 아니라는 변명을 여러 번 속으로만 삼켰다.
그러다 드킹콘의 가장 마지막 순서로 색자가 등장했다. 드랙퀸인 색자는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의 곡과 뮤지컬 '레베카'의 넘버인 '레베카'에 맞춰 우아하고 매혹적인 공연을 보여주었다. 색자가 공연에서 보여준 아름다움은 오직 색자만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기에 나는 판단할 새도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감동이 아니라 충격으로 인해 터져 나온 것이다.
공연을 보는 동안 색자의 '원본'인 바브라 스트라이샌드와 댄버스 부인을 연기한 배우들의 얼굴은 완전히 잊혔다. 색자는 다른 누구와도 닮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언젠가의 어디서 혼자 제련되었을 보석과 마주했을 때의 놀라움. 그 자리에서, 색자라는 인물의 몸짓 속에 누적된 퀴어한 시간의 표층들을 봤다고 감히 말해도 될까? 나는 이런 종류의 감상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임을 안다. 그러나 반드시 증언해야만 하는 감상이다. 누군가에게 말해두지 않는다면, 비명에 가까운 환호성도 없이 어두운 곳에 둘러앉아 그토록 '이상한 사람들'과 함께 있었다는 것을 나조차 믿을 수 없게 될까 봐.
퀴어 이론가 주디스·잭 할버스탐은 '퀴어 시간'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와 이성애 규범적인 생애주기 바깥의 시간들을 설명하려 시도했다. 할버스탐에게 퀴어 시간이란 새벽 2시의 드랙쇼에서 끝내주는 퍼포먼스를 봤을 때야 비로소 감각되는, 퀴어로서 '살아있는' 시간이다.
그 시간은 사회에서 '정상적'으로 기능하기 위해 돈을 벌고 배우자를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고 노후를 준비하고 여유 자금을 확보하는 등의 짜여진 틀 속에서는 보이지도 않고 보여서도 안 되는 무엇으로 관리된다. 아마도 드킹콘은 진지한 누군가에겐 아무 가치도 없는 시간 낭비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같은 누군가에게 드킹콘은 퀴어로서 황홀하게 살아있을 수 있는, 유일하게 가치있는 시간을 감각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