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드립니다

입력
2022.01.01 04:30
26면

1999년 12월의 화두는 ‘새 천 년’이었다. 며칠 후면 21세기가 시작된다며, 여기저기서 밀레니엄을 외쳤다. 2000년 0시에 태어날 아기를 부를 ‘밀레니엄 베이비’란 말도 미리 생겼다. 컴퓨터가 2000년을 인식하지 못해 ‘밀레니엄 버그’ 오류가 발생할 것이라는 무시무시한 소문도 들렸다. 그때 태어난 아이가 성년이 되었다. 지금 돌아보면, 처음 겪는 기대와 설렘에 심히 호들갑스러웠던 면도 없지 않다.

사실 2000년은 21세기가 아니다. ‘세기’란 100년을 단위로 하는 기간이다. 1세기는 1년에서 100년까지를 말한다. 같은 방식으로 계산해 보면 21세기는 2001년에서 2100년까지를 이르는 말이다. B.C. 1년과 A.D. 1년 사이에 0년이 없어, 세기의 시작은 늘 1년이다. 2000년을 21세기라 해 버리면, ‘20세기’는 99년짜리, ‘21세기’는 101년짜리인 한 세기가 되고 만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라며 고백해 본다면, 2000년은 21세기의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 해로, 한 세기를 차분히 돌아보고 정리할 때였다.

말이란 다수가 쓴다고 해서 곧 맞는 것이 아니다. ‘다르다’와 ‘틀리다’는 다르다. 말에는 같고 다름도 있으나, 맞고 틀림도 있다. 들리는 소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같은 말이 아닐뿐더러, 맞는 것은 더욱 아니다. “오늘은 왠지 칼국수가 당겨”에서는 ‘왜인지’의 줄임 형태인 ‘왠지’로 쓴다. 그러나 “여기까지 웬일이에요?”라고 할 때는 ‘어찌 된 일’을 묻는 것이라서 다른 형태로 쓴다. “막차를 놓쳐서 어떡해”는 ‘어떻게 해’의 준말이다. ‘어떡해’는 “그래서 집에 어떻게 갈 거예요?”의 ‘어떻게’와는 다른 말이다. 만약 외국어로 적는 문제였더라면 소리가 비슷하다고 해서 그저 아는 글자로 적고 말까?

한 해의 마지막이자 또 한 해가 시작되는 때이다. 한자리에 모인 기회에 여럿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할 일도 많을 때다. 그렇게 자리를 빌릴 때는 ‘이 자리를 빌려서’라고 한다. ‘이 자리를 빌어서’란 말이 많이 들리는데, ‘빌리다’란 말의 느낌이 싫어서인지, 두 말이 헷갈려서인지 잘 모르겠다. ‘빌다’는 소원대로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거나 잘못을 용서해 달라고 할 때 쓰는 말이다. 아무래도 감사하는 사람이 잘못한 사람처럼 용서를 싹싹 ‘빌’ 리는 없지 않은가? 지난 한 해, 우리말을 톺아보는 데 공감해 주신 독자들께 이 자리를 빌려서 감사드린다.

이미향 영남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