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부인

입력
2021.12.30 18:00
26면

편집자주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영부인(令夫人)’은 원래 남의 아내를 높여 부르는 말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에 대한 존칭으로 흔히 쓰다가, 현대에는 대통령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주로 쓰인다. 국제적으로 국가원수 부인을 가리키는 말로 널리 쓰이는 용어는 ‘퍼스트레이디(First Lady)’다. 미국에서 유래됐는데, 1849년 4대 대통령 제임스 매디슨의 부인 돌리 매디슨의 국장 때 재임했던 12대 대통령 재커리 테일러가 조사에서 고인을 ‘퍼스트레이디’로 지칭한 게 처음이라고 한다.

▦ 선출직 대통령이나 총리의 부인으로서 영부인은 당연히 법적 직책은 아니다. 국가수반의 부인으로서 의전과 예우 규정은 있지만, 법적 책임과 권한은 어디에도 없다. 하지만 정치 현실에서 영부인은 무엇보다 대통령에 대한 사적(私的) 영향력이 워낙 큰데다, 실제로 최고 권력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으로서 관행화한 정치ㆍ사회적 역할이 분명히 존재해온 게 사실이다.

▦ 청와대 사상 영부인의 지위와 역할을 가장 인상적으로 구현한 인물은 박정희 대통령 부인 고 육영수 여사일 것이다. 초대 이승만 대통령은 재임 시 이미 국부로 추앙되기까지 했지만,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는 잠시 대한부인회 총재를 맡은 걸 빼곤 일절 공적 활동에 나서지 않았다. 반면 육 여사는 강골이지만 고독했던 박 대통령의 자리를 목련처럼 온화한 기운으로 감싼 현숙한 부인 이미지에 더해, 어린이와 약자에게 늘 따뜻한 손을 내밀었던 사회운동가로서 활동도 많아, 생전에 이미 ‘국모(國母)님’ 칭호를 듣기까지 했다.

▦ 민주화로 권위주의 시대가 종식된 후론 영부인의 정체성도 변화했다. ‘국모’대신 대통령과 동지적 지위와 역할을 구축한 김대중 대통령 부인 고 이희호 여사나 노무현 대통령 부인 권양숙 여사가 그런 사례인 셈이다. 영부인으로서 공적활동을 더욱 화려하게 발전시킨 경우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부인으로 나중에 국무장관에 이어 대통령 출마까지 나아간 힐러리 클린턴의 사례도 있다. 하지만 영부인으로서 공적 지위나 역할을 어느 정도까지 감당하느냐는 당사자에게 달린 것이지, 제도적으로 보장하거나 떠맡길 일은 아니라고 본다.

장인철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