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24일 국정농단 등 사건으로 수감 중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특별사면·복권했다. 한때의 정적(政敵)을 정치적·사법적으로 용서함으로써 국민통합을 꾀한다는 것이 청와대가 앞세운 명분이다.
문 대통령은 불법 정치자금 수수로 수감됐다 만기출소한 한명숙 전 국무총리를 복권 조치했고, 내란 선동죄로 수감 중이던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가석방했다. 헌법상 대통령의 특권인 특별사면권의 혜택을 보수·진보 진영에 '고루' 내린 것이다.
'헌정 파괴자들이 특혜를 누릴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분분한 상황에서, 문 대통령의 결정은 공정, 정의, 평등이라는 국정의 대원칙을 훼손했다. "특별사면권을 엄격하게 제한해 행사하겠다"는 문 대통령의 약속도 파기됐다. 차기 대선을 75일 앞둔 시점의 '전격적 사면'은 정략적 의도에서 비롯됐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박 전 대통령 사면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에게 악재라는 시각이 많다.
박 전 대통령은 2017년 3월 헌법재판소의 만장일치 의견으로 대통령에서 파면됐다. 같은 달 구속된 박 전 대통령은 올해 1월 확정된 징역 22년 중 4년 9개월만 채우고 이달 31일 0시 석방된다. 벌금 미납액 150억 원 납부도 면제받았다.
문 대통령은 사면권 행사 직후 "우리는 지난 시대의 아픔을 딛고 새 시대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 앞에 닥친 숱한 난제들을 생각하면 무엇보다 국민 통합과 겸허한 포용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사면에 반대하는 분들의 넓은 이해와 혜량을 부탁한다”고도 했다.
문 대통령은 '국민 통합'을 말했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은 사면 대상에서 빠졌다. 그는 뇌물 수수 등으로 징역 17년이 확정돼 수감 중이다. 국민의힘은 "선택적 사면으로 야권 분열을 노린 것"이라고 비판했다.
"문 대통령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반복되는 정치 보복의 악순환을 끊는 차원에서 임기 중에 박 전 대통령을 풀어주고 싶어 한다. 사면권을 행사한다면, 대선 개입 논란을 피하기 위해 내년 3월 이후가 될 것이다." 그간 여권엔 이 같은 관측이 많았다.
박 전 대통령 사면은 이번 주 들어 급박하게 결정됐다. 문 대통령은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를 비롯한 당·청 인사들과 두루 협의하지 않은 채 직접 각계 의견을 수렴했다고 한다. 청와대에서도 극소수 참모들에게만 공유됐다. 사면 후폭풍에 대한 책임을 홀로 지겠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최근 박 전 대통령의 건강이 급격히 악화했다는 보고를 받고 사면을 심각하게 고심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전 대통령은 장기간 수감으로 인한 허리 디스크 등으로 지난달부터 삼성서울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고 있다. 정신건강도 불안정한 것으로 전해진다.
박 전 대통령 사면이 '인도적 조치'이기도 하다는 것이 청와대의 설명이지만, 현직 대통령이 결과적으로 차기 대선에 '폭탄'을 던졌다는 비판을 벗기는 어렵다. 진보진영에선 "문 대통령이 '촛불 정권'의 촛불을 눌러 껐다"고 반발했다.
문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부터 사면권의 엄격한 제한을 약속했고, 박 전 대통령 사면 조건으로 ‘진심 어린 사과와 국민 공감대’를 조건으로 제시했다. 올해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선 “과거 잘못을 부정하고 재판 결과를 인정하지 않는 차원에서 사면을 요구하면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구속 이후 사죄한 적이 없다.
문 대통령은 자신이 내건 약속과 조건을 단번에 깨고 여론 설득 등 최소한의 절차적 과정을 생략한 채 사면을 단행했다. “뇌물ㆍ알선수재ㆍ알선수뢰ㆍ배임ㆍ횡령 등 5대 중대부패범죄는 사면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공약도 어겼다. 박 전 대통령과 한 전 총리에 적용되는 혐의들이다.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거물 정치인들의 사면이 ‘국민통합’에 기여한다는 이론은 입증된 바 없다.
정부는 이날 박 전 대통령 등을 포함해 3,094명을 오는 31일 자로 사면ㆍ복권 및 감형 조치하기로 발표했다. 이석기 전 통합진보당 의원은 만기를 1년 5개월 앞두고 가석방됐다. 최명길·최민희·박찬우·이재균·우제창 전 의원 등 선거사범 315명도 복권됐다.
제주해군기지 건설ㆍ사드배치ㆍ밀양송전탑 반대 시위나 세월호 관련 집회 등에 참여했다가 유죄 판결을 받은 65명도 사면ㆍ복권했다. 2015년 민중 총궐기 집회를 주도한 이영주 전 민주노총 사무총장은 형 선고 실효 및 복권을, 2011년 희망버스 집회 등을 주도한 송경동 시민운동가는 복권 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