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충청남도와 충청북도의 경계지역에 세종특별자치시(이하 세종시)가 설치되었다. 세종시는 충청남도 연기군 전체와 공주시 일부, 충청북도 청주시 일부를 흡수한 영역을 행정구역으로 삼고 있다. 세종시에 편입된 연기군·공주시·청주시의 대부분 권역에서는 농업이 이루어지고 있었으므로, 세종시는 도시와 농촌이 결합된 도농복합시(都農複合市)라는 성격을 태생적으로 지니고 있다.
하지만 현재 '세종시'라는 말을 들었을 때 대부분의 한국 시민이 떠올리는 것은 세종시 전체에서 행정기관이 모여 있는 신도시 일부 지역의 고층 아파트 단지들일 것이다. 이 신도시는 옛 연기군 남면 지역에 해당한다. 그리고 신도시에 자리하고 있는 LH 세종특별본부의 테니스장 옆 구석진 곳에는 연기군 남면의 마을비석과 그 밖의 석상들이 십 년 동안 방치되고 있다. 신도시 조성이 끝난 뒤에는 원래 자리에 돌려놓기로 했던 것들이다.
이렇게 남면을 비롯한 옛 연기군 각지의 비석들이 방치되어 있는 문제는 5년 전에 현지 언론에서 지적된 바 있다(2016년 6월 2일 자 세종의소리 ''찬밥신세' 전락한 옛 연기군 마을 표지석'). 하지만 내가 지난여름에 현지를 답사했을 때에도 상황은 여전했다. 세종시에 옛 연기군의 정체성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상징적인 공간이다.
신도시가 만들어지면 새로이 사람들이 모여들고, 새로운 입주자들은 예전의 마을 이름 대신 새로운 이름을 붙이려는 경향을 보인다. 옛 연기군 남면 방축리와 고정리, 공주시 장기면 당암리가 세종시 탄생 이후 방축동·고정동·당암동이 되는 대신 도담동·고운동·다정동으로 정해졌다(2012년 7월 10일 자 연합뉴스 '"주민의견 반영 안 돼"…세종시 마을 이름 논란'). 세종시 탄생 당시의 뉴스는 "도담동이란 명칭이 방축동보다 훨씬 세련되고 부르기도 편하다"는 신도시 입주민의 말을 전하고 있다(2012년 12월 28일 자 연합뉴스 '세종시 조치원역·일부 마을 이름 변경 논란'). 이들 이주민에게 세종시란 예전의 농촌 시절이 존재하지 않는, 역사가 없는 땅 위에 새로이 탄생한 인공 도시여야 하는 것이다.
세종시가 탄생하기 전 그 땅에 존재했던 옛 연기군 전체와 공주시·청주시 일부의 기억이 이렇게 지워지고 있는 가운데, 이에 대한 저항을 주도하고 있는 곳이 조치원읍이다. 이러한 저항을 가장 잘 보여준 사건이, 경부선 조치원역을 세종역으로 바꾸려던 세종시 행정당국의 움직임을 막아낸 것이다. 당시 조치원읍의 어떤 시민은 "세종특별자치시 세종역으로 바뀌면 조치원이란 지명도 서서히 잊히는 곳으로 전락되고 우리 후손들에게는 세종이란 명칭으로 조치원이란 지명은 역사 속으로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2012년 8월 8일 자 충청투데이 ''조치원역→세종역' 개명 찬반논란'). 결국 조치원역은 이름을 그대로 유지했다. 옛 연기군 정체성과 현 세종시 정체성의 싸움에서 연기군 쪽이 거둔 작은 승리다.
얼마 전 세종시 조치원읍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기조강연을 맡았다. '원도심 유휴공간 활용 창업 세미나'라는 이름의 세미나였다. 세종창조경제혁신센터와 문화유산 활용 청년기업 PAL문화유산센터, 그리고 고려대 세종캠퍼스 학생들이 조직한 아카이빙팀 아키오스코프가 공동 주최한 행사였다. 이 세미나는 1935년에 세워졌던 옛 조치원 정수장을 개조한 조치원 문화정원에서 열렸다.
이 자리에서도 조치원역 이름을 세종시로 바꾸는 문제에 대해 참석자들의 서로 다른 의견이 오고 갔다. 신도시 쪽에 산다고 밝힌 한 청중은 "조치원역을 세종역으로 바꾸어야,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세종시를 방문하라고 할 때 설명하기가 편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서 나와 함께 발표를 맡았던 전 조치원읍장 윤철원 선생은, 조치원역을 세종역으로 바꾸려는 움직임을 막았던 당사자로서의 견해를 밝혔다.
나는, 세종시가 만들어질 때 조치원은 일단 조치원시로 독립할 필요가 있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못해서 결국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례로서 영등포를 거론했다.
서울시 영등포구와 세종시 조치원읍은 비슷한 역사를 경험했다. 옛 경기도 시흥군의 중심지였던 영등포과 옛 충청남도 연기군의 중심지였던 조치원은 1931년에 똑같이 읍으로 승격해서 영등포읍과 조치원읍이 되었다. 영등포읍은 1936년에 경성부에 편입되었는데, 이때 영등포읍내에서는 경성부에 편입되는 대신에 영등포시로 독립하자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결국 영등포는 경성에 편입되었다.
영등포의 주민들은 1970년대까지도 경성·서울과는 다른 독자적인 지역이라는 정체성을 지켰다. 1970~1980년대의 한국 상황을 생생하게 전하는 뿌리깊은나무 출판사의 '한국의 발견' 서울·영등포구 편에서는, "1970년대의 첫 무렵 때까지만 해도 한강 남쪽에 살던 서울 사람은 '서울 사람'이 아니라 '영등포 사람'이었"고, 영등포구는 "서울에 딸린 한 구였기보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서울이라는 도시와 맞선 독립된 한 도시"였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그 후 50년간, 영등포는 서울과는 구분되는 독자적인 정체성을 점점 상실해갔다. 이와 함께, 강북 사대문 및 강남과 아울러 서울의 3핵이라는 중심 지역으로서의 비중마저 서서히 잃어 가는 중이다. 영등포구에 속하는 여의도는 여전히 서울의 정치·경제중심이지만, 여의도는 영등포의 여타 지역보다는 한강 건너 마포구·용산구와의 일체화를 이루어가고 있다. 만약 광명시·과천시 규모의 영등포시가 독자적으로 존재했다면, 이런 식으로 영등포의 독자성과 중요성이 축소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일찍이 한 세기 전 영등포가 걸었던 궤적을 현재 조치원읍이 걷고 있는 것 같다. 조치원읍은 조치원역을 중심으로 보았을 때 주로 동쪽으로 도심이 발달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동쪽으로 발전하는 길은 현재 막혀 있는 상태다. 조천이라는 강을 경계로 해서 그 동쪽으로는 충청북도 청주시가 있기 때문이다. 위성사진을 보면 조천의 서쪽으로는 조치원읍의 도심지가, 동쪽으로는 청주시의 농촌지대가 펼쳐지는 대조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행정구역이 도시 발전과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 하지만 행정당국과 정치인들은 모든 개발이 자신들의 관할 구역 안에서만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 때문에, 어떤 도시나 공업단지가 여러 행정구역에 걸치면 시민들에게 불편을 끼치는 일이 발생하기도 한다. 2008년부터 개발이 시작된 위례신도시는 서울시 송파구 위례동,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위례동, 경기도 하남시 위례동으로 쪼개져 있다. 그렇다보니, 동시에 개발된 동일한 생활권의 위례신도시의 주민들이 각자 서로 다른 행정기관과 도서관을 이용하고 서로 다른 쓰레기종량제봉지를 사용하는 등 혼란이 이어졌다. 위례신도시에서 거두어들일 수 있는 세금을 빼앗길 수 없다는 세 지방자치단체의 고집이 빚어낸 결과이다(2017년 11월 2일 자 매일경제 '서울-성남-하남 나뉘었던 위례신도시 '생활권-행정구역 불일치' 문제 해결').
그러다보니 조치원읍은 동쪽 청주시 방향으로 발전하기보다는, 서쪽으로 세종 신도시 쪽을 향해 개발하는 방향을 택했다. 이 지역에는 고려대와 홍익대의 캠퍼스가 있어서 기본적으로 도시화의 수요가 존재한다. 조치원읍 서창리의 옛 농촌 마을들은, 이러한 조치원역 서부의 개발 바람 속에 서서히 해체되고 있다. 서창리를 걷다가, 옛 마을의 어귀로 생각되는 고개 위에서 4H운동 비석을 확인했다. 조선 시대에는 장승이, 현대 한국에서는 4H운동 비석이나 새마을운동 비석이 마을의 입구에 세워졌다. 이 4H운동 비석 너머로는 약간의 농촌 마을 구조가 남아 있지만, 그 주변으로는 곳곳에서 새 건물들이 세워지면서 농촌 마을을 포위해 들어오고 있었다.
과연 조치원읍은 서쪽으로 계속 뻗어나가서, 직선거리로 10㎞ 떨어져 있는 세종 신도시 지역과 연담화될까? 한국의 인구는 계속 줄어들 것이지만, 대서울권과 부산·창원·울산·포항·경주의 동남권, 그리고 세종·청주·대전·공주의 중부권은 각각 독자적인 메가시티로서 존재할 것으로 나는 전망하고 있다. 그러므로 조치원읍과 세종 신도시의 인구는 여타 지방과는 달리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
세종 신도시와 연담화함으로써 조치원읍이 KTX천안아산역 일대처럼 새로운 도심으로 거듭난다면, 옛 연기군의 군청소재지이자 근대에 철도 도시로서 발달했던 조치원읍이 지니고 있던 독자적인 정체성은 세종시라는 정체성에 밀려 사라질 가능성이 있다. 영등포읍이 1936년에 경성부에 통합되고 나서 반세기가 지난 뒤 독자적인 정체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조치원읍을 걸으며 "연기"라는 지명을 마주할 때마다, 나는 애틋한 심정으로 사진을 찍어 기록하고 있다. "연기군청소재지 조치원읍"이라는 지역이 한때 영등포와 맞먹는 세력을 지닌 큰 도시였다는 사실이 잊혀지지 않도록.
마찬가지로 예전에는 충청북도 청주시 권역에 속했던 옛 청원군 부용면도, 세종시로 넘어와 부강면이 된 후로는 청주시 지역과 연결되어 있던 생활권을 인위적으로 단절당하면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있다(2012년 7월 25일 자 충북일보 '"무늬만 명품 세종특별자치시는 싫어요" - 청원 부강면 출신 시의원과 주민들의 호소'). 독립운동가 박열의 애인이던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 1903~1926)가 어린 시절을 보낸 이곳 부용면=부강면 주민들은, 세종시가 역사적인 정체성을 옛 연기군에서 찾다보니 조치원읍보다 더 큰 소외감을 느끼는 것 같다. 공주시에서 넘어온 장군면 역시 마찬가지다.
이번에 참석한 조치원읍의 세미나에서는 옛 연기군이 세종시로 이어졌다는 식의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 그러나 청주와 공주에서 넘어온 부강면과 장군면을 포함해서, 세종시의 정체성을 연기군=세종시가 아닌 좀 더 넓고 복합적인 관점에서 설명할 필요가 있다. 한국처럼 구석구석에서 오래전부터 사람들이 살아온 나라에서는, 역사가 없고 원주민이 없는 땅은 거의 없다. 송도 신도시같이 매립지에 들어선 것이 아닌 이상, 신도시·공업단지·항만·공항·발전소·댐 건설 예정지는 누군가 오랫동안 살아온 곳이다. 이들 원주민의 정체성을 인정해야 한다. 원주민을 한국의 발전을 방해하는 훼방꾼·알박기로 치부하고, 마치 전투에서 적군과 싸우듯이 이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고 추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