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의 문법

입력
2021.12.21 22:00
27면

대기업의 홍보 담당 임원을 지낸 지인이 얼마 전 페이스북에 이런 글을 올렸다. 김건희씨가 15일 자신의 경력을 허위로 기재한 것에 대해 기자들에게 한 사과 발언이 성에 안 찼나 보다. "이렇게 말했어야 하지 않을까"라며 자신이 사과문을 썼다.

당시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에게 김씨가 한 말은 이렇다. 딱 두 문장이었다.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 드린 점에 대해 사과할 의향이 있습니다. 사실관계 여부를 떠나 국민께 불편함과 피로감을 드린 점 사과드립니다."

이 분이 고친 글은 이렇다.

"사실, 결혼 전 그때만 해도 제가 대통령 후보자의 아내가 될 줄은 솔직히,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대학의 겸임교수나 초빙교수라고 하는 자리는 공개경쟁을 통해 들어가는 자리도 아니어서 저의 시원찮은 경력이나 학력을 좀 더 그럴싸하게 보이고 싶었던 욕심에, 과장하고 부풀려서 적었습니다. 지금 와서 돌이켜 보니 저의 생각이 너무 짧았고 무척 어리석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제 불찰이고 잘못입니다. 많이 꾸짖어 주십시오."

김건희씨는 그 전날 보도로 기자들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다는 걸 알았을 테고 발언을 준비했을 거다. 더구나 대선정국에서 처음으로 얼굴과 목소리를 드러내게 되는 자리였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밖에 말하지 못했을까. 이 분을 캠프에 보내라는 댓글이 달린 걸 봤다. 무엇을 왜 사과하는지 알 수 없는 김씨의 발언은 오히려 독사과가 되고 만 사과였다. 안 하니보다 못했다.

남편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는 부인의 사과에 대해 "적절한 사과"라고 하면서도 "본인 입장에서 할 말이 많아도… 여권의 기획공세가 부당하지만… 국민 눈높이에 미흡하다면…"이라고 주렁주렁 사족을 달았다. 주렁주렁 매달려야 좋은 건 먹는 사과다. 윤 후보는 이후 국민에게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라는 표현을 썼다. '이유야 어떻든'이란 말은 얼마나 교묘한가. 이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이유 여하가 없다면 사과 여하도 없는 거다.

사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가장 신비한 마술이라고 한다. 진정한 사과는 서로를 치유하고 용서하고 틀어진 관계를 복원시키는 유일한 비책이다. 훌륭한 사과로 위기를 기회로 반전시키거나, 나쁜 사과로 사태를 더 악화한 기업이나 정치인의 실제 사례는 커뮤니케이션 교과서에 차고 넘친다.

사과에서는 해야 할 말보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더 많다. 사과 문법 첫 줄은 '토 달지 말 것'이다. '잘못한 것처럼 보인 데 대해' 사과하지 말고 잘못을 적시해 사과해야 한다.

대선 정국에 여야 후보와 가족, 관련자들의 사과가 하루가 멀다 하고 이어지고 있다. 추문만으로도 역겨운데 영혼이 없는 사과까지 봐야 하니 차라리 리모컨을 넷플릭스로 돌리고 만다. 판이 돌아가는 것을 보건대 앞으로 국민의 심려를 끼칠 일은 분명히 더 많아질 것이다. 비호감이 더 크다는 선거, 그나마 쿨한 사과를 보면 기분이 나아지겠다. 눈치 보다가 등 떠밀려 억지로 하지 말고, 변명하지 말고 확실하게 인정하고, 마지막 줄에 구차한 용서를 구하지 않는 사과를 보고 싶다. 용서는 당신들이 먼저 꺼낼 말이 아니다. 그건 우리가 당신들에게 해줄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사과는 상대가 용서해야 끝나는 것이다. 유권자는 실수는 용서해도 오만은 용서하지 않는다.


한기봉 전 언론중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