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베트남 중부 다낭시의 유일한 한국 사회인 야구팀 '투란 드래곤즈'의 2회초 공격. 사회인 야구 경력 15년차, 정두환(45) 감독의 목소리는 계속 커져만 갔다. 인접한 필리핀 리그부터 산전수전 다 겪은 그지만 지금 마운드에 서 있는 상대팀 선발투수 뚜안(22)의 공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았다. 분명 정식으로 야구를 배운 적 없는 평범한 베트남 대학생이라고 들었는데, 포수 미트에 꽂히는 공의 소리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한국말을 모르는 뚜안은 그저 묵묵히 공을 뿌렸다. 1회에 삼진 2개로 가볍게 투란 드래곤즈의 기세를 꺾은 그는 2회의 모든 아웃 카운트를 삼진으로 채웠다. 시속 110~115㎞의 직구에 '커브'라 부르긴 아직 애매한 느린 변화구, 단 두 구종이었지만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한국 프로야구(KBO) 직구 평균이 140㎞대에 달하고, 미국 메이저리그(MLB) 투수들이 160㎞를 쉽게 찍는 시절에 그게 뭔 대수냐 할 수 있다. 하지만 프로리그가 없어 사회인 야구 경기로 기량을 유지하는 동남아 투수들의 직구 평균 구속은 100km에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볼 끝이 살아 있는 뚜안의 공이 그들에겐 마구로 보이는 이유다.
4회까지만 던진 뚜안의 기록은 삼진 11개와 볼넷 1개, 안타 8개에 2실점(비자책)이었다. 실점들은 그가 속한 다낭 사회인 야구팀 '리자몽'의 동료들이 아직 쉬운 땅볼 하나도 제대로 캐치하지 못해 빗맞은 공들이 죄다 내야 안타 혹은 실책으로 이어진 탓이다. 아웃 카운트를 잡은 12명 중 삼진을 당하지 않은 유일한 타자도 자신이 직접 플라이볼로 처리한 선수였다. 사실상 혼자 힘으로 4회를 온전히 막아낸 셈이다.
마운드를 내려온, 야구를 독학으로 익힌 지 이제 6년에 불과한 뚜안은 곧장 하노이 야구팀 주장 찌엔에게 달려갔다. 움푹 파인 축구장 주변 트랙에서 그립과 릴리스 타이밍 등을 열심히 배우는 그는 매우 진지했다.
지금은 뚜안의 스승이지만 찌엔 역시 5년 전 이장형 전 하노이 한국국제학교 야구팀 감독(체육교사)을 만나 한국 기술을 배우기 전까진 유튜브로만 야구를 접하던 청년이었다. “야구를 모르던 시골 소년이 급성장해 '언히터블(Unhittableㆍ타격하기 힘든)’ 에이스 투수가 된다.” 식상하디 식상한 야구만화의 레퍼토리는 그렇게 베트남에서 현실이 되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교직이 아닌 베트남 야구협회(VBSF) 한국지원단장을 맡고 있는 이씨는 미소를 숨기지 못했다. 그는 "올 1월 동나이에서 개최된 베트남 챔피언십 야구대회에서 뚜안을 처음 봤을 때 '물건'이라고 확신했다"며 "아직 싱싱한 어깨에 야구에 대한 열정이 가득해 한국의 전문적인 코칭으로 더 가다듬기만 하면 훌륭한 투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투란 드래곤즈와 리자몽의 경기는 단순한 친선전이 아니었다. 야구 저변 확대를 위한 '찾아가는 야구 체험 행사'로 기획됐으나, 실제로는 내년 하노이에서 개최되는 동남아시안게임(SEA) 야구 종목에 처음으로 출전시킬 초대 베트남 국가대표팀을 구성하기 위한 사전 평가의 일환이었다. 지난 4월 발족한 VBSF는 이미 하노이를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뚜안과 같은 잠재력 있는 선수들을 발굴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스카우팅 리포트는 '베트남 야구의 아버지'이자 VBSF의 총고문인 '헐크' 이만수 전 SK와이번스 감독에게 최종 보고된다. 이 전 감독의 조율 아래 실전 데이터를 바탕으로 1차 선발된 인원들은 내년 상반기 국가대표 선발전에 정식으로 참여할 수 있다.
선발전은 뚜안처럼 검증된 선수들과 전국 각지에서 지원한 신인 등 총 100여 명이 참가한다. VBSF는 포지션별 기초 체력 및 기술 개인 평가를 진행한 뒤, 최종 연습 경기를 통해 20명의 국가대표를 뽑을 방침이다.
베트남 야구 국가대표팀을 이끌 한국 코치진의 윤곽도 곧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한국야구위원회(KBO)는 이 전 감독의 '헐크 파운데이션' 측과 협의해 초대 감독 후보군을 추린 것으로 알려졌다.
국가대표팀이 뛸 정식 규격 야구장 건설 역시 속도를 내고 있다. VBSF는 최근 하노이 도심 내 부지 선정 작업을 끝냈으며, 인허가를 위해 하노이시와 막판 조율을 이어가고 있다. 국대 선수와 코치진 구성 및 야구장까지, 한국이 디자인한 베트남 야구의 첫 모습이 공개될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한국이 베트남에 야구를 전파하는 이유는 꽤 복합적이다. 처음은 이 단장과 이 전 감독이 베트남인들의 야구 열정에 감탄해 시작된 작은 인연(본보 2020년 10월15일자 '한국 야구 전수 받은 베트남 '외인구단', 동남아 4강 꿈 영근다')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야구라는 양국의 교집합은 산업과 문화 영역에서 다양한 연쇄 반응을 일으키고 있다. 가장 먼저 베트남에 한국식 야구가 전파되면,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은 손쉽게 기업 이미지를 현지에 홍보할 수단을 얻게 된다. VBSF 또한 이 같은 부분을 고려, 베트남 첫 야구장 메인 스폰서를 가급적 한국 기업으로 유치하고자 한다. 홍보와 인프라 구축. 서로 바라는 시선은 달라도 매개체는 결국 야구라는 얘기다.
다만 현장에서 진행되는 한국 야구 전수의 모든 과정은 여전히 '스포츠를 통한 양국 우호 확장'에 맞춰져 있다. 실제로 주베트남 한국문화원 역시 또 다른 스포츠 한류로 야구를 전파하겠다는 목표가 뚜렷하다. 투란 드래곤즈와 리자몽의 경기 전날, 다낭의 영국 국제학교(UK ACARDEMY) 야구팀에 한국 야구 용품을 후원한 것이 대표적 예다. 지금은 야구를 사랑하는 베트남인들을 늘리고 기초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고 보는 것이다.
한국문화원은 베트남 야구의 미래를 위해 베트남어 야구교본 제작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KBO와 이 단장이 초안을 만들고 한국문화원이 보급할 최초의 베트남 야구교본은 이르면 내년 초 현지인들의 손에 쥐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 관계자는 “국민 영웅이 된 박항서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사례에서 알 수 있듯 스포츠에서 형성되는 우호 관계는 매우 강력하다”며 “축구에 이어 야구가 한국과 베트남의 새로운 연결고리가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한국의 국익은 충분히 확보된다”고 단언했다.
물론 아직 세상의 때를 타지 않은 다낭의 젊은 선수들은 양국 우호, 이런 추상적인 이슈까진 체감하지 못한다. "야구는 그냥 야구일 뿐"이라며 해맑게 웃는 이들은 자신들이 앞으로 자국 프로 야구선수로만 살 수 있을지도 예측하지 못하는 터다.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야구를 즐기고, 야구를 통해 더 행복해지는 것. 그 단순한 스포츠의 존재론적 가치가 이들이 야구를 택한 이유의 전부였다.
그래도 한 명. 미래의 베트남 에이스를 꿈꾸는 뚜안만큼은 달랐다. 국가대표 선수가 돼 하노이의 정식 마운드에서 멋진 공을 던지는 것이 당면 목표였고, 끊임없이 성장하고 발전하길 갈망했다.
"조금만 기다려 달라. 열심히 배우고 연습하고 있다. (우리를 도와준) 한국인들에게 곧 동남아를 제패하는 베트남만의 야구를 보여주겠다." 당찬 포부를 남긴 그의 손엔 한국이 전해 준 야구공이 꼭 쥐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