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그림·설치작품... 산업화의 유산, 예술을 입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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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1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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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관광공사 추천, 문화기지로 변신한 산업기지

용도를 다하고 낡아가던 건물을 재활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넓은 내부 공간을 카페나 전시장으로 개조해 이른바 신복고(뉴트로) 유행을 이끄는 시설이 대표적이다. 여기에 역사와 환경까지 고려한다면 의미가 더 크다. 한때 산업화 시대를 이끌었던 시설이 지역의 문화 중심으로 변신하고 있다. 한국관광공사가 추천하는 도시재생 여행지를 소개한다.

1급 보안 석유비축기지가 마포 문화비축기지로

서울 성산동의 마포 문화비축기지는 산업화 시대의 유산이다. 1970년대 석유 파동을 겪으며 비상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지은 석유비축기지를 개조했다. 1976년부터 1978년까지 아파트 5층 높이에 둘레 15∼38m나 되는 탱크 5기가 들어섰다. 숲으로 가려진 1급 보안 시설로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었다. 2000년에 서울월드컵경기장 500m 이내의 위험 시설로 분류돼 폐쇄된 후, 2017년 ‘문화비축기지’로 일반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지는 T0부터 T6까지 7개 공간으로 나뉜다. 가압펌프장과 소화액 저장실이었던 T0(문화마당)는 스티븐 퓨지의 벽화가 그려진 ‘아트 스페이스 용궁’으로 변신했다. T5(이야기관)는 마포석유비축기지의 역사를 보여 준다. T4(복합문화공간)는 탱크 내부를 공연장과 전시실로 꾸민 공간이다. 원형 탱크의 무게를 분산하는 철제 기둥과 천장에서 우산살처럼 뻗어나간 소화액 관이 인상적이다. 천장의 유량 계측 구멍으로 스며드는 빛이 묘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T3(탱크원형)는 탱크 원형을 보존하고 있다. 녹슨 철판의 탱크와 지붕으로 오르는 철제 계단, 탱크를 둘러싼 콘크리트 방유제까지 원래 모습 그대로다. T1은 탱크를 해체하고 벽과 지붕을 유리로 바꿨다. 매봉산 암반이 한눈에 들어오고, 계절과 날씨에 따라 내부 분위기가 바뀐다. T2는 야외무대와 공연장으로 쓰인다.

문화비축기지 중심의 T6(커뮤니티센터)는 T1과 T2를 해체할 때 나온 철판으로 꾸몄다. 2층에는 동그란 하늘을 만나는 ‘옥상마루’와 생태 도서관 ‘에코라운지’, 1층에는 카페 ‘Tank6’가 들어섰다.

인근의 선유도도 비슷한 경우다. 한강의 선유도는 아름다운 경치 덕분에 ‘신선이 놀던 산’, 선유봉(仙遊峰)이라 불렸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암석을 채취하며 훼손되기 시작해, 1965년 양화대교가 관통하고 1978년 정수장을 세우면서 그 절경은 완전히 사라졌다. 근대화 과정에서 큰 상처를 입은 선유도는 2002년 생태공원으로 부활했다.


공원 정문에 들어서면 관리사무소 건물이 보인다. 수조에 모래와 자갈 등을 담아 불순물을 걸러내는 시설이었다. 내부에 섬의 역사를 담은 사진이 전시돼 있다. 수질정화원에서는 계단식 수조를 거치면서 물이 정화되는 과정을 관찰할 수 있다. 수생식물을 심은 온실에서도 정수 과정을 살필 수 있다. 옛 침전지의 스테인리스 수로를 그대로 활용했다.

송수 펌프실을 문화공간으로 꾸민 ‘선유도 이야기관’, 콘크리트 지붕을 들어내고 기둥만 남긴 ‘녹색 기둥의 정원’이 이어진다. 규칙적으로 배열된 콘크리트 기둥을 휘감은 담쟁이덩굴이 계절마다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침전지의 구조물이 온전하게 남은 ‘시간의 정원’도 손꼽히는 포토존이다. 취수 펌프장을 리모델링한 카페 ‘나루’에서는 평화로운 한강 전망이 펼쳐진다.

선유도에는 장애인주차장만 있다. 버스를 타고 선유도공원 정류장에 내리거나, 한강공원 양화선착장 주차장에 차를 대고 걸어서 선유교를 건너 들어가야 한다.

폐광에 핀 예술, 정선 삼탄아트마인

2013년 함백산 자락에 문을 연 정선 삼탄아트마인은 1964년부터 2001년까지 삼척탄좌 정암광업소였다. 종합사무동이던 건물은 겉보기에 단층 같지만 실제는 언덕에 기댄 4층이다. 입구에서 아래로 내려가며 관람하는 구조다.

탄가루가 범벅이 된 얼굴에 눈동자만 빛나는 광부의 대형 초상화가 관람객을 맞는다. 계단을 따라 한 층 내려가면 삼탄역사박물관과 현대미술관이 나온다. 작은 공간에 가득한 서류 더미가 눈길을 끈다. 수십 년간 모은 직원들의 급여 명세서와 건강관리표 등이 지나간 시대를 증언한다.


마인갤러리는 전시 공간이다. 3,000여 명이 3교대로 이용하던 샤워실, 작업용 장화를 씻던 세화장에 당시 분위기를 살린 독특한 작품이 전시돼 있다. 레일바이뮤지엄은 지하에서 캐낸 석탄이 모이던 곳으로, 높이 53m의 권양기(광부와 석탄을 운반하는 산업용 엘리베이터)를 비롯한 설비가 거대한 뼈대를 드러낸다. 영화와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촬영지다.

건물 밖은 ‘기억의 정원’이다. 연탄으로 쌓아 올린 탑, 광부의 실루엣을 담은 철근 작품, 석탄을 실어 나르던 탄차 등이 전시돼 있다. 갱도에 공기를 공급하던 중앙압축기실에는 원시미술관이 들어섰다. 동굴벽화와 조각 등 세계 각국의 원시미술 작품이 땅속에 공기를 공급하듯 관람객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는다. 월요일 휴관, 관람료는 성인 1만3,000원이다.

충주 활옥동굴도 관광지로 변신한 폐광시설이다. 1900년 발견된 국내 유일의 백옥·활석·백운석 광산으로 한때 8,000여 명이 일했던 산업 현장이었다. 값싼 중국산 활석이 수입되면서 문을 닫고 오랫동안 방치되다 2019년 동굴 테마파크로 개장했다. 갱도 2.5㎞ 구간을 각종 빛 조형물과 교육장, 공연장, 건강테라피존 등으로 꾸몄다. 내부 평균기온은 11~15도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하다.

이곳에도 지하에서 채굴한 활석과 백옥을 운반하던 권양기, 운반차가 다니던 레일이 그대로 남아 있다. 동굴 곳곳에 네온을 이용한 조형물이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하이라이트는 암반수가 고인 호수로, 2, 3인용 투명 카약을 타고 관람할 수 있다. 고추냉이를 재배하는 동굴농원, 충주 사과로 빚은 와인과 식초 저장고도 있다. 입장료는 성인 7,000원, 카약 이용료는 3,000원이다.

통신 시설이 빛과 음악의 궁전으로, 서귀포 빛의 벙커

서귀포 성산읍의 ‘빛의 벙커’는 KT가 국가 통신망을 운용하기 위해 해저 광케이블을 관리하던 건물이다. 1990년에 완공한 사다리꼴 철근콘크리트 건물로 가로 100m, 세로 50m, 높이 10m, 벽 두께 3m에 이른다. 지붕은 1.2m 벽에 높이 1m 공간을 두고, 다시 1m를 올린 이중 구조다. 이를 가로세로 1m짜리 콘크리트 기둥 27개가 떠받쳐 요새나 다름없다. 괜히 벙커가 아니다.

센터는 존재하지만 없는 듯했다. 건물 위에 흙을 덮고 나무를 심어 산처럼 위장했기 때문이다. 주변에 방호벽을 두르고 이중 철조망과 적외선 감지기를 설치한 뒤, 현역 군인이 통제했다. 인근 주민들도 정체를 모르던 시설이었다. 2000년대 초부터 용도 없이 방치되던 시설에 2015년 제주커피박물관에 이어 2018년 빛의 벙커가 입주했다.


빛의 벙커는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장이다. 빔 프로젝터 90대가 벽과 바닥에 영상을 투사해 명화를 연출하는 방식이다. 개관 기념으로 ‘구스타프 클림트-색채의 향연’, 2019년 ‘빈센트 반 고흐-별이 빛나는 밤’에 이어 현재는 르누아르, 모네, 샤갈, 클레 등의 작품을 전시 중이다.

파트Ⅰ ‘Voyages to Mediterranean(지중해로의 여행)’은 이상주의부터 모더니즘까지 6개 시퀀스에 500여 작품을 선보인다. 르누아르의 ‘물랭 드 라 칼레트의 무도회’, 모네의 ‘수련’ ‘양산을 쓰고 오른쪽으로 몸을 돌린 여인’, 샤갈의 ‘율리시스의 메시지’ 등이 약 35분 동안 펼쳐진다. 파트Ⅱ는 파울 클레의 ‘Painting Music(음악을 그리다)’이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 주제곡과 클레의 작품이 10분 동안 공간을 채운다. 69대의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의 조화가 환상적이다.

전시장 가장자리에는 벽에 기댈 수 있는 의자가 있다. 움직이는 그림을 따라 걸으며 감상할 수도 있다. ‘불멍’ ‘물멍’을 하듯 ‘빛멍’하는 곳이다. 빛의 벙커 홈페이지와 네이버 오디오클립에서 소설가 김영하와 뮤지컬 배우 카이가 들려주는 오디오 도슨트 서비스를 제공한다. 관람료는 성인 1만8,000원이다.

●사진=한국관광공사 제공

최흥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