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초등학교 2학년 딸을 둔 30대 직장인입니다. 아이가 네 살 때 이혼을 했어요. 면접교섭권을 통해 아이를 만나왔는데, 아이가 갑자기 저와의 만남을 거부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이혼 원인은 양육 방식의 차이였습니다. 시어머니는 제 3개월간의 출산 휴가가 끝나기도 전에, 요양보호사 일을 그만두고 육아를 전담하겠다고 나섰어요. 친정에 부탁할 수 있어 내키지 않았지만 남편이 무릎을 꿇고 자기 엄마가 아이를 보게 해 달라며 울면서 사정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어머니가 처음 몇 달간은 저희 집으로 오다가 나중에는 아이를 시댁으로 데려가 돌봤습니다. 저희가 주말에만 시댁에 가서 아이를 1박 2일 보게 됐어요. 아이와 떨어져 사는 게 괴로워 시댁 근처로 이사를 갔지만, 가까운 거리라도 환경이 바뀌는 게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아이는 계속 시댁에 머물렀고 주말에만 아이를 봐야 했습니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양육 방식은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둘은 아이가 세 살이 넘도록 24시간 아이의 취침, 대변, 우유량을 기록하는 차트를 관리했습니다. 외출은 10~20분 집 청소할 때를 제외하고는 엄두를 내지 못했어요. '아이와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은 자기 욕심이고, 밖에 나가면 감기에 걸리고, 감기에 걸리면 폐렴에 걸리고, 폐렴에 걸리면 죽는다'가 레퍼토리였습니다. 감기에 걸리기라도 하면 원인이 저라며 질책하고요. 옷도 아무거나 입힐 수 없었고, 아이에게 뽀뽀도 금지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보내고 싶은 어린이집이 저와 다르자, 둘이 정한 곳으로 몰래 보내기도 했어요. 둘이 부부인 양 행동했습니다.
모든 게 이런 식이라 저도 어느 순간 목소리 내기를 포기했던 것 같아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집을 나왔고, 1년 소송 끝에 이혼했습니다. 처음에는 아이가 딸이고 제가 경제력이 있어 양육권을 가져올 수 있을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이가 어렸을 때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란 데다, 아이를 데리고 있던 아이 아빠, 할머니가 소송 중 연락이 두절되면서 저는 아이를 전혀 볼 수 없게 됐습니다. 결국 제가 친권과 양육권을 포기하고 한 달에 3번 주말에만 보는 것으로 조정했습니다. 이혼 후 아이 손을 잡고 마트를 가는데, 처음으로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이혼하고 나니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이 아빠와 할머니는 이혼 후 5년간 눈이 오거나, 미세먼지가 많거나, 덥거나 또는 알 수 없는 사유로 당일 면접교섭을 파기하는 일이 빈번했고, 아이를 데리고 나와서도 '가고 싶어, 안 가고 싶어? 안 가고 싶지?' 하며 손을 놓지 않는 행동을 반복했습니다. 결국 면접교섭이행신청 끝에, 한 번 더 면접교섭을 방해하면 양육권자를 엄마로 바꾸겠다는 판사의 으름장을 듣고서야 직접적 방해가 줄었습니다.
그것도 잠시, 이번에는 아이가 돌변해 저를 밀어내기 시작했어요. 증오하는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며 가기 싫다, 보기 싫다, 평생 안 볼 거라면서 만남을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어떤 날은 "엄마가 나 버리고 도망갔잖아! 그때 녹음한 것도 있어!"라고 하더군요. 시어머니가 평소 자주 했던 말입니다. 아이는 지금 6개월째 아파트 주차장까지만 내려와 인사도 하지 않고 5분 정도 있다 돌아갑니다.
이전까지는 주말마다 정말 즐겁게 보냈습니다. 아이를 보러 가는 날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거른 적 없고 양육비도 물론이고요. 집에는 아이 방도 따로 있고 함께 살 날만을 기다리는데, 아이는 제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 마음을 알고 싶습니다.
김세희(가명·39·직장인)
세희씨, 자식은 부부와 다르게 헤어질 수도, 마음에서 지울 수도 없는 존재죠. 자식이 이유 없이 부모를 거부할 때, 그 마음을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거예요. 혹자는 그렇게 아이를 생각했다면, 왜 두고 왔느냐고 말할 수 있겠지만 사연이 가감 없다면 당신이 결혼 생활을 지속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보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양육할 때는 옳고 그름과 인간의 도리, 절대 하지 말아야 되는 것과 꼭 해야 하는 것을 가르쳐주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야만 사람이 인간다워집니다. 아이를 인간답게 양육하는 이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적절한 통제는 꼭 필요해요.
그런데 통제가 과도하면 그 또한 인간답지 못한 결과를 낳습니다. 과도한 통제는 아이가 시행착오를 경험하며 자율적인 결정, 자기의 삶을 헤쳐나가는 주도성,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다루는 능력을 배울 기회를 빼앗아요. 물론 인생 경험이 많은 어른의 뜻대로 통제하면 결과는 일시적으로 좋을 수 있지만, 자기 삶을 스스로 살아나가는 내면의 힘은 생기지 않습니다.
세희씨 사연에 따르면 시어머니는 과도한 통제를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아이를 안전하게 양육하는 건 굉장히 중요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 과정에서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게 아이는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겁니다. 내가 아니에요. 너무 사랑하지만 결국 타인이고 아이와 아이의 인생이 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신의 인생을 살아나가도록 부모는 곁에서 조력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그게 진정한 존중입니다.
예를 들면, 엄마는 오늘 날씨가 쌀쌀하니 카디건을 걸치고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아이에게 설명을 합니다. 그런데 아이는 두꺼워서 불편해 입기 싫다고 해요. 그랬을 때 건강에 해가 되지 않을 정도라고 판단되면 '가방에 넣어줄 테니 추우면 입어'라고 말하는 게 적절한 통제입니다. 그러나 입으라고 계속 강요하면서 '이러다 감기 걸리면 병원 가면 주사 맞아야 돼', '그러다 아파서 입원해도 엄마는 몰라, 너 혼자 입원시킬 거야'라고 하는 건 과도한 통제죠. 이 정도 말했는데도 싫다고 하면 '너, 그러다 잘못하면 죽어'라고 겁을 줍니다. 결국 아이는 죽는다는 말에 항복을 하고요. 이렇게 하는 것은 과도한 두려움을 동원해서 두 손을 들게 하는 것이지요. 사연대로라면 지금 아이 할머니가 아이를 이렇게 대합니다.
본인에게 이유를 물으면 '아이를 사랑해서'라고 답할 거예요. 하지만 이런 과도한 통제의 기저에는 사랑보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아요. 시어머니는 이 불안을 다른 사람을 탓하는 방식으로 부정적으로 표출하기도 합니다. 물론 아이 할머니가 손주를 사랑하는 건 맞습니다. 누가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건 적절한 사랑이 아닙니다. 본인의 근거 없는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아이의 모든 경험을 다 막는 거예요. 아이는 자기 생활 연령에 맞게, 발달 단계에 맞게 겪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부모가 세상의 위험과 예상치 못한 변수를 언제까지나 다 막아주고 통제할 수는 없어요.
과도한 통제는 시어머니의 직업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요양보호사는 고령의 기저질환자나 말기 암환자를 많이 만납니다. 건강에 영향을 주는 사소한 변수도 생명을 위태롭게 하기에 이런 분들을 두고 '터미널 스테이지(terminal stage)'에 있다고 하는데요, 시어머니는 감기에 걸리면 폐렴으로 이어져 사망할 가능성이 높은 고위험군 환자를 돌보듯이 아이를 양육하고 있는 것 같아요.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면, 시어머니는 아들도 그렇게 키웠을 거예요. 그러니 아이 아빠도 아내와의 관계에서 성인답게, 아버지답게 의논하고 헤쳐 나가는 데 부족한 면이 많습니다. 어린이집을 선택하는 중요한 결정도 아내가 아닌 어머니의 의견을 더 귀담아듣습니다. 조부모의 조력을 받고 의논은 하더라도, 양육의 주체는 부모여야 하는데 주변부로 밀려나 버린 거죠. 양육자의 과도한 통제에 자녀는 통상 두 가지 반응을 보이는데, 양육자가 정해 놓은 테두리 안에 순응하거나 반대로 극렬히 저항하게 됩니다. 아이 아빠는 전자였던 것 같아요. 시어머니와 남편의 과도한 통제를 당신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을 거예요.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었을 겁니다.
시어머니는 자기가 통제할 수 없었던, 끝내 그 테두리를 박차고 나간 며느리가 미울 겁니다. 자신이 밉다고 아이의 면접교섭권도 방해하죠. 그런데 이런 행동은 정말 자기밖에 모르는 행동입니다. 아이는 엄마, 아빠 양쪽이 다 자기의 뿌리입니다. 이혼한 상대 배우자를 부적절하게 아이 앞에서 욕하는 것은 아이 출생의 근본을 부정하는 행동입니다. 시어머니는 자기 엄마가 나쁜 사람이라고 듣고 자라는 것이, 감기에 걸려 아픈 것보다 아이에게 훨씬 악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어요.
정보가 제한적이라 조심스럽지만, 시어머니는 아이가 엄마와 자주 만나서 친해지게 되어 할머니보다 엄마를 더 좋아하게 되는 것에 대한 불안과 아이가 할머니의 통제를 따르지 않을 것에 대한 두려움이 내면에 있었을 거예요. 만일 어른들이 평소 아이 앞에서 엄마를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거나 엄마를 나쁘게 이야기했다면 아이는 엄마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을 학습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이들은 그럴 때 본능적으로 '저는 당신들 편이에요'라는 것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어른들에게 잘 보여서 살아남아야겠다는 생존 본능이지요. 아이 입장에서는 함께 살고 있는 할머니와 아빠가 생존의 동아줄처럼 여겨지기 때문일 거예요. 그래서 엄마를 좋아하고 만나고 싶어하는 것은 자기를 키워준 할머니와 아빠를 배신하는 것이라고 느낄 수도 있겠지요. 또는 '엄마가 너를 두고 가버리더라'와 같은 말에 정말 자기가 버림받고, 거절당했다고 생각해서 엄마를 거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상처 받은 마음을 드러내고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는 세희씨에게 면접교섭권을 가진 엄마로서의 의무와 권리를 꾸준히 성실하게 해 나가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아이가 엄마를 안 따라간다고 하더라도, 주차장에서 잠깐 얼굴을 보더라도,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고 이야기해 주세요. 아이가 본체만체하거나 설령 길에 버리고 갈지언정 생일, 크리스마스 때 편지나 카드도 쓰고 선물을 주며 사랑을 표현하세요. 어떤 날은 마음이 너무 아프고,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할 거예요. 하지만 자식과 관련된 일은 의미를 따지는 게 무의미합니다. 자식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예요.
희망적인 건 아이들은 성장하며 생각도 커 나갑니다. 아이들은 절대 이 상태에 머물러 있지 않아요. 아이 할머니도 아이가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는 현실을 깨닫는 날이 옵니다. 5분을 보더라도 꾸준히 만날 때, 아이는 그래도 엄마가 나를 사랑하고 나에 대한 애정을 변함없이 준다고 생각할 거예요. 설령 지금 엄마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한다고 해도, 당신이 결코 아이를 버린 적 없고 마음 깊이 사랑한다는 진실은 바뀌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세요. 아이도 분명 엄마의 진심을 알게 될 날이 올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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