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영웅 아닌 빌런'…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 준 삶의 교훈은

입력
2021.12.17 04:30
14면
룰루 밀러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번역 출간
"인간이 이름 붙이지 않은 세계에도 삶은 존재"

삶의 혼돈과 무질서를 깨닫고 삶을 포기할 생각까지 했을 때 발견하게 된, 나의 롤모델로 삼을 만한 과거의 인물. 그의 인생 궤적을 좇다 의외의 사실을 깨닫는다. 사실 그는 영웅이 아닌 빌런(악당)이었던 것. 하지만 예상 못 한 영웅의 비밀스러운 이야기에도 어두운 유산은 있었다. 그렇게 나는 이 복잡한 역사 속 인물에게서 크고 작은 삶의 교훈을 찾아나간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과학 이야기의 외피를 입고 삶의 질서를 말하는 인문 에세이다. 미국의 과학 전문기자인 저자는 희망이 필요했던 시기, 생물 분류학자이자 스탠퍼드대 초대 총장을 지낸 데이비드 스타 조던(1851~1931)에 대해 우연히 알게 된다. 조던은 그의 생존 당시 밝혀진 어류 1만2,000~1만3,000종 가운데 2,500종 이상을 식별해 목록화했다. 그는 생명체가 서로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그 관계를 밝히는 데 평생을 바쳤고, 1906년 샌프란시스코 대지진으로 수집한 어류 표본이 내동댕이쳐졌을 때 절망하지 않고 물고기의 피부에 이름표를 꿰매 붙이는 식으로 표본을 되살려 낸 끈기 있는 인물이다.

저자는 삶의 혼돈에 굴복하지 않은 조던에게 매료됐다. 역경의 시간을 이겨내는 방법을 알려주리라는 기대도 있었다. 책의 전반부는 조던의 전기에 가깝다. 조던의 결점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책 후반부는 저자 자신의 경험과 견해에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말하자면 책은 전기와 회고록, 철학서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조던을 알기 위해 절판된 조던의 회고록, 그가 쓴 동화, 철학 에세이, 강의계획서, 사설 등 수많은 문서를 뒤지기 시작한다. 문제는 그를 파헤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그의 실체다.

조던이 부지런히 어류에 이름을 붙이는 동안 첫 번째 아내는 외로움을 호소했고, 병마와 싸우다 숨졌다. 두 번째 아내는 전처의 아이들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스탠퍼드대 총장 재직 시에는 측근의 비위를 덮기 위해 사서를 협박해 사직하게 만든 이력도 있다.

결정적으로 조던은 열광적인 우생학자였다. 그는 고착생활을 하는 멍게를 게으름과 퇴보의 예로 들었다. 인류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적용했다. 빈곤과 타락 같은 특징이 유전될 수 있고, 박멸될 수도 있다고 믿었다. 찰스 다윈의 고종 사촌인 영국 과학자 프랜시스 골턴이 주창한 우생학을 미국에 들여온 이들 중 한 명이 조던이었다. 그는 우생학을 지지하는 논문을 발표했고, 자신이 지구상에서 제거해 버리고 싶은 빈민과 술꾼, 바보, 도덕적 타락자를 '부적합자'라는 한 범주에 몰아넣었다. '부적합자' 박멸을 위한 우생학적 불임화의 합법화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특히 저자는 후대의 분류학자들이 조던이 분류한 '어류'가 견고한 진화적 범주가 아님을 발견했다고 지적한다. 그가 수많은 미묘한 차이를 어류라는 하나의 단어 아래 몰아넣었다는 이야기다. 가령 고래는 유제류(발굽 동물)에 속하며 먹장어·칠성장어는 초기 척추동물인 무악류로 분류된다는 설명이다. 따라서 저자는 "조류는 존재하고 포유류도 존재하지만 콕 꼬집어 어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물고기를 한 집단에 몰아넣은 조던의 분류법에 대해, 인간이 우리의 상상 속 사다리에서 정상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우리와 다른 동물들 사이의 유사성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면서 민들레를 예로 들어 조던의 우생학을 반박한다. 누군가에게 잡초처럼 보이는 민들레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약재이자 염료로 소중하게 쓰일 수 있다며 "인간들, 우리도 분명 그럴 것"이라고 전한다.

조던의 전기 형식이 강한 전반부까지는 책의 성격이 불분명해 보이기도 하지만 모든 존재의 다양성과 삶의 질서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책이다. 책을 관통하는 메시지는 혼돈 속 삶의 공존이다. 원저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이라는 혼돈과 이로 인한 차별과 양극화 등의 무질서가 이어진 지난해 출간됐다. 책 곳곳에서 삶의 혼돈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고민이 묻어난다.

교화적 성격이 다분한 여타의 인문 서적과 달리 소설처럼 읽히는 독특한 구성이어서 색다른 독서 경험을 선사하는 책이다.


김소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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