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수험생들 '집단 지성', 평가원 오만함 꺾었다

입력
2021.12.16 04:30
생명과학Ⅱ 정답취소 판결 이끌어낸 수험생들
①SNS 여론전으로 수험생들 지지 이끌어내고
②해외 전문가에게 문의해 "이상하다" 답변받아

"어린 학생들의 '집단지성'이 어른들의 '오만함'을 심판했다."

15일 법원에서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생명과학Ⅱ 정답 취소 판결이 나오자 교육계 안팎에서 나온 반응이다. 아직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않았거나 갓 졸업한 어린 학생 92명이 힘을 합쳐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을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들은 지난달 18일 수능을 치른 직후 정답이 공개되자 곧바로 이의를 제기했다. 예상대로 평가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은 방법은 소송밖에 없었다.

카드뉴스로 여론 환기 ... 생명과학Ⅱ 안 치른 학생까지 '지지'

학생들은 대형 로펌을 선임한 평가원에 맞서야 했다. 법적 전문성에서 뒤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단 법정 밖 여론전을 벌였다. 소송인단에 참여한 대구 출신 백모(21)씨는 "모두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이었음에도 단체 카톡방에서 소송에 도움이 될 만한 아이디어를 내고, 스스로 그 일들을 나눠 맡았다"며 "내가 참여한 건 해당 문항의 문제점을 지적한 카드뉴스 제작이었는데, 많은 공감을 이끌어 낼 수 있어 힘이 났다"고 말했다.



한 입시학원 관계자도 "보통 수험생들은 자신과 직접적 관계가 없는 일에 무관심한 편인데, 소송 참여 학생들이 적극적 여론 형성을 통해 생명과학Ⅱ에 응시하지 않은 학생들의 지지까지 얻어 내는 걸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해외 석학에게 "문제 잘못됐다" 답 이끌어 내

여론전만으론 부족했다. 전문가들의 평가가 필요했다. 하지만 국내 전문가들은 '침묵 카르텔'을 이어갔다. 괜스레 귀찮은 일에 연루되기 싫은 것이다. 수험생을 대리한 일원법률사무소 김정선 변호사는 국내 학회 20여 곳에다 해당 문제의 오류 여부를 물었다. 공식 답변을 내놓은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김종일 서울대 유전체의학연구소장, 고교에서 생명과학Ⅱ를 가르치는 교사 몇몇, 이 정도만 '개인 의견임을 전제로' 출제 문항이 잘못됐다는 의견을 냈다.

이런 침묵이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서운했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해외를 공략하기 시작했다. 해당 문항, 그리고 이에 대한 이의제기 내용을 영어로 번역해 외국 대학 교수, 연구진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수백 통의 이메일을 보낸 결과, 집단유전학 분야의 세계 최고 석학이라 꼽히는 조너선 프리처드 스탠퍼드대 석좌교수로부터 "모순이 있다"는 답을 이끌어 냈다. 프리처드 교수는 자신의 트위터에 같은 내용의 글을 올리기도 했다.

김정선 변호사는 "출제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실수를 덮으려고만 한 평가원에 저항한 학생들의 승리"라며 "재발방지를 위해선 책임자들의 진정 어린 사과는 물론, 법적·제도적 개선 작업까지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태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