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셋이 주구장창 술 마시는 얘기가 되겠어?" 의심, 퇴짜, 한동안의 기다림 그리고 다시 퇴짜. 이런 순간이 반복되면서 드라마 '술꾼도시여자들'('술도녀') 제작은 4년 여를 표류했다. 심의가 감당하기 어려운 술로 찌든 이야기를 반길 방송사는 없었다. 결국 이 드라마는 넷플릭스가 아닌, 국내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티빙에서 올 상반기에 편성이 확정됐다. CJ ENM과 JTBC 콘텐츠 다시 보기 플랫폼으로 더 친숙한, 그야말로 콘텐츠 유통의 끝자락을 붙든 상황이었다.
방송가에서 찬밥 취급받던 '술도녀'가 올겨울 일을 냈다. 티빙은 지난달 12일 국내에 상륙한 세계 OTT 시장 골리앗 디즈니플러스를 1인당 평균 사용 시간에서 1.8배(모바일인덱스 기준·11월15~21일) 앞섰다. 마블 독점 콘텐츠인 '완다버젼' 등 할리우드 최신 화제작을 줄줄이 앞세운 디즈니플러스보다 티빙에 시청자들이 더 오랫동안 머물렀다는 뜻이다. 예상치 못한 반전으로, 10월22일 첫 공개된 '술도녀'가 온라인에서 뜨거운 화제몰이를 한 결과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엔 '원래 한드(한국 드라마) 안보고 주 서식지는 넷플릭스였는데, 요즘 '술도녀'도 보고 있다'(@1u_****) 등의 글이 줄줄이 올라왔다. 15일 티빙에 따르면 '술도녀' 공개 5주 후인 지난달 넷째 주 기준 유료가입자 수는 10월 대비 36배 폭증했다. OTT시장에 역전만루홈런을 쏘아 올린 주인공은 위소영(38) 작가. "작가 선배를 만났는데 ''술도녀' 극작 제안 들어왔을 때 못 한다고 했는데, 그걸 네가 해 냈구나'라더라고요." 최근 서울 중구 한국일보를 찾은 위 작가의 말이다.
'술도녀'는 도시여자들이 왜 술꾼이 됐는지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직장은 나를 태우고, 철없는 연인은 영혼을 갉아먹으며, 친구는 때론 쌍욕을 퍼붓고 등을 돌린다. 92년생, 이제 막 서른이 된 소희(이선빈) 지구(정은지) 지연(한선화) 세 주인공은 그렇게 소진된 영혼을 밤마다 함께 모여 술로 적신다. 동갑내기 세 동창은 미지근한 소주로 술잔을 기울이며 진한 우정을 나누고, 사람들을 그 술자리에 불러 모은다. "제가 여중,여고,여대를 나왔거든요. 보통 남자들이 호스트가 돼 와이프를 동반하는 데 전 반대예요. 친구들이 주도해 각자의 남편 혹은 남자친구를 데려오고, 자리를 만들죠. 드라마 속 세 주인공은 대학 때 방송반을 함께 한 저와 제 친구들 모습이기도 해요. 둘은 작가가, 한 명은 승무원이 됐죠. 주량요? 강촌으로 MT 갔을 땐 그 주변 편의점 술을 휩쓸었을 거예요, 하하하"
지연은 회장의 '갑질'로 난데없이 회사에서 동물을 키운다. 위 작가는 "지인이 겪은 일"이라고 했다. 현실은 '지옥'이다. 위 작가는 직장에서 벌어지는 온갖 작태들을 거침없이 그려 공감대를 높인다. "유치원 베이비시터부터 극장, 만화책방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숱하게 하며" 머리가 아닌 몸으로 쓴 대본이라 가능했다.
요가 선생인 지연이 혼자 사는 오피스텔엔 괴한이 습격한다. "목동에 혼자 오래 살았는데, '마포 발발이 사건'으로 시끄러웠어요. '그것이 알고 싶다'팀에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저한테 집을 한번 점검해보라고 하더라고요. 현관문 문고리를 확인하니 주변에 연필로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는 거예요. 알고 보니 여자 혼자 사는 집엔 동그라미 표시를, 아닌 집엔 'X'표시를 해놓았더라고요." '술도녀'는 요즘 여성들이 사는 이 시대의 거울이다. "몹쓸 사회가 왜 술을 권하는고?" '술도녀'를 보면 현진건의 단편 '술 권하는 사회'의 그 유명한, 아내가 절망을 되씹는 말이 떠오른다. 원작인 웹툰 ' 술꾼 도시 처녀들'이 술과 안주에 집중했다면, 위 작가는 90년대생이 '꼰대'들의 조직에서 느끼는 염증과 그 안에서 여성의 대처와 우정을 도톰하게 살려 승부수를 띄웠고, 성공했다.
'술도녀'에서 여운이 깊은 에피소드는 소희 아버지 장례식 장면이다. 빈소가 채 꾸려지기 전 지구는 장례식장으로 가장 먼저 달려간다. 넋을 잃은 친구 대신 지연은복잡한 장례 절차를 직접 정리한다. '술도녀'에선 여성이 상주이고, 장례 지도사도 여성이다.
"비현실적이죠? 그런데 그러고 싶었어요. 전 제 아버지 돌아가시면 그 관을 제가 들고 싶어요. 관 엄청 무겁다는 거 알고 맞지만, 마지막 배웅이잖아요. 전 유서에 제 관 들어줬으면 하는 사람 1~8번까지 다 써놨어요. 수시로 바뀌지만요, 하하하".
'술도녀'에서 세 주인공은 강릉 경포대의 횟집을 가 옛 남자친구를 찾는다. 이 과정은 게임처럼 그려져 웃음을 돋운다. '응답하라' 시리즈 얘기를 꺼냈더니, 위 작가는 "저도 12~13년 동안 예능 작가로 일했다"고 맞받았다. SBS '붕어빵'을 비롯해 '짝' 제작에도 참여했다. "대학교 3학년 때 아이템 작가로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한 달에 50만원 받고, 책 읽고 구성을 짜는 일이었죠. 정일우 나왔던 '거침없이 하이킥' 작업도 했고요".
고교 선생이었던 지구는 유튜버로 전업했다. 유튜버로 세상의 중심에 쏙 들어가 있는 것 같지만, 그는 종이접기 방송을 하며 은둔형 외톨이처럼 산다. 위 작가의 삶과도 닮았다. 그는 2016년 인기를 누린 드라마 '또 오해영' 대본 집필에 참여했지만, 이후 슬럼프에 빠졌다. 독립해서 홀로 시도한 작업은 번번이 무산됐다. 개인적인 일로 주저앉기도 했다. 위 작가는 "너무 힘들어 2년 동안 지인 연락 끊고 잠수를 탔다"고 말했다. 그 어둠의 터널을 어렵게 빠져나온 그에게 지연 역을 맡은 한선화는 예기치 못한 버팀목이 됐다. "처음엔 선화씨가 '이런 사람이 있을까요?'라며 부담스러워했어요. 여성들에게 미움 살 수 있는 캐릭터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때 술 마시며 '저도 확신 없어요. 정말 인생 너무 안 풀리고' 하면서 제 푸념을 했더니, 선화 씨가 그러는 거예요. '작가님, 왜 이렇게 내 인생이랑 비슷해요? 저도 너무 힘들었어요. 제가 이 작품 꼭 성공시켜드릴게요'라고요." 작가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감정이 울컥 솟아오른 듯 했다.
'술도녀'에서 횟집을 운영하는 '큰' 소희(문희경)는 황혼이혼을 하고 그리스로 떠난다. 위 작가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정말 좋아한다"며 "소설 속 주인공처럼 평생을 자유롭게 살다 죽고 싶어 극에 녹였다"고 말했다. 횟집 주인은 소희 지구 지연과의 마지막 만찬에서 김추자의 '미련'을 흥얼거린다. 위 작가가 술 마실 때 즐겨 듣는 곡이라고 한다.
티빙은 이날 '술도녀' 시즌2 제작을 발표했다. 위 작가는 다시 경기도 양평 작업실로 향한다. "'술도녀' 보면서 간만에 와이프랑 한 잔 하면서 즐겁게 봤다는 글을 봤어요. '술도녀'로 그 시절 나를 떠올리며 한 숨 돌렸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그런데 지금 시즌2 대본 한 줄도 못 썼어요. 어쩌죠? 그리고 많이들 궁금해 하시는 데, 전 미지근한 소주보다 이제 막 차가워지기 시작한 소주를 좋아합니다,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