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12월 15일 일본이 구조에 나서고, 한국 정부는 사고 사실조차 몰라…남영호 사고의 비극

입력
2021.12.15 05:30
1970년 12월 15일 
깜깜했던 10시간, 338명 중 12명만 생존
구조 신호 묵살 등 총체적 문제 드러나

편집자주

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1970년 12월 15일 새벽 1시 15분, 제주에서 부산으로 향하던 남영호가 왼쪽으로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선원들은 비상주파수로 두 차례 구조신호(SOS)를 타전한다. 그리고 불과 10분 후인 1시 25분, 배가 뒤집히고 만다. 배에서 빠져나온 생존자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 뒤집힌 배와 귤상자 등을 붙잡고 겨울 바다의 추위와 사투를 벌인다. 새벽 3시, 배는 침몰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그토록 기다리던 구조의 손길은 쉽게 오지 않았다.

새벽 5시 20분이 되어서야 사고 해역을 지나던 어선에 생존자 1명이 구조되고, 오전 8시 일본 어선 두 척에 의해 표류 중인 승객과 승무원 4명이 구조됐다. 이후 일본 순시선이 출동해 구조에 나섰지만 정작 대한민국 정부와 관계기관은 사고 사실 조차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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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한국일보 보도에 따르면 남영호에서 보낸 SOS는 여수어업무선국에 수신됐으나 숙직원에 의해 묵살됐다. 당시 여수어업무선국에서 숙직 중이던 무선사 이동배씨는 "15일 새벽 1시 20분부터 25분 사이에 SOS를 두 번 수신한 후 즉시 위치, 선박명 등을 알리라는 무전을 보냈으나 응답이 없어 수협중앙회나 해경 여수기지대 등에 보고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결국 탑승자 338명 중 생존자는 일본 어선에 구조된 8명과 한국 어선에 구조된 1명, 사고 후 12시간 넘어 뒤늦게 온 한국 해경에 의해 구조된 3명 등 12명뿐이었다.


생존자 사투의 시간 … 사고 후 시간대별 상황

새벽 1시 40분, 선내에서 탈출한 150명가량과 함께 뒤집힌 배 옆구리를 잡고 있던 승객 최옥화씨가 멀리서 배 한 척이 지나가는 것을 발견한다. 생존자들은 목이 터져라 "사람 살려요"라고 소리 질렀지만 배는 아무 반응 없이 지나갔다. 최씨는 누군가 자기 머플러를 풀어 태우기 시작한 것을 목격했다. 하지만 구조 요청을 위한 불은 태울 것이 바닥나 20분 만에 꺼지고 만다.

2시, 비교적 거센 첫 파도가 배를 쳐 선복에 매달려 있던 승객 20여 명이 물결에 휩쓸려갔다. 다음번 파도에 다시 30여 명이 떨어져 나갔다.

2시 30분, 배 안에서 '쿵 쿵 쿵'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해녀 출신인 최씨는 남영호의 완전 침몰을 직감, 배에 휘말려 들지 않으려고 널빤지 하나를 잡고 헤엄쳐 나갔다.

3시, 남영호 선체가 완전 침몰한다. 선장 강태수씨는 이때까지 30~40명의 승객이 배에 매달려 있는 것을 본다. 강 선장이 목격한 남영호의 최후는 선수가 동북쪽으로 크게 기울면서 물속에 잠긴 것이었다. 배에 매달린 승객은 물살에 휘말려 거의 바닷속으로 끌려들어 갔다. 배에서 상당히 떨어져 처참한 이 모습을 지켜본 최씨는 자신을 뒤따르며 헤엄치던 남자들이 한두 사람씩 자취를 감추는 것을 본다. 최씨는 이대로 가면 죽을 것 같아 방향을 잡기로 했다. 하늘을 쳐다보자 삼태성이 보이고 그 옆에 큰 별이 있어 그 사이를 목표로 서서히 헤엄쳐갔다.

귤장사를 하러 제주도에 갔던 김정순씨는 배가 침몰될 때 남편과 헤어져 혼자서 나무 궤짝을 잡았다. 박순자씨는 선장 강씨가 살아남은 승객에게 귤상자를 밀어주는 것을 멀리서 본다. 생존자들도 차차 파도에 밀려 뿔뿔이 헤어졌다.

4시, 최옥화씨는 차차 손발이 저리고 정신이 희미해지며 잠이 왔다. 잠들지 않으려고 다리를 꼬집어 보았다. 이때 불을 켠 어선 한 척이 다가왔다. "사람 살려요"하고 있는 힘을 다해 소리를 질렀다. 고함 지르기 수십 번, 그러자 배가 20미터쯤 앞까지 다가왔다. 선장실 문이 열리면서 "사람이다"하는 소리가 들렸다. 최씨를 구조한 배는 어선 희영호였다. 하지만 희영호는 더 이상의 구조나 사고 소식을 전하지 않고 현장을 떠난다.

오전 8시, 사고현장 부근을 지나가던 일본어선 '고아마루'와 '고겡마루'가 표류 중인 승객과 승무원 4명을 발견, 구조했다.

8시 34분, 일본 어선 2척은 현장 부근을 돌던 일본 순시선 '구사가끼'에 "한국 선박 침몰, 4명 구조"라고 무전을 쳤다. 이 무전이 남영호 조난의 첫 소식이 됐다.

9시, '구사가끼' 순시선은 한국 해경대에 무전으로 여객선 침몰 사건을 타전했으나 한국 측의 응답은 없었다. 약 16분 뒤 '구사가끼'는 일본 제7관구 해상보안본부에 "한국인 4명 구조, 한국 해경대에 타전했으나 응답 없음. 본부에서 한국에 직접 연락 바람"이라고 타전한다. 이 무렵 일본 어선에 의해 4명이 2차로 구조됐다.

9시 30분, 일본 제7관구 해상보안본부는 대마도에 있는 5척의 순시선을 현장에 급파, 구조활동에 협조토록 지시했다. 이 사실은 일본의 총리를 통해 주일대사관에 통보, 한국 측에 알려졌다.

10시 30분, 한국 선박 침몰 사건이 외신 보도로 국내에 처음 전해졌다. 교통부는 부산, 제주 해운국에 조난 선박 유무를 확인하도록 지시했으나 10시 50분까지 부산 해운국은 확인치 못했다.

11시 30분, 외무부도 전언 통신을 받고 부산국은 미도착 선박을 조회한 결과 오전 8시 30분 도착 예정인 남영호가 미도착임을 비로소 확인한다.

낮 12시 25분, 해경 경비정 3척이 구조차 출동, 1시간 30분 뒤 조난 위치를 확인했다.

오후 3시 30분, 해경부대장이 탄 경찰비행기가 나무판자에 탄 3명의 조난자를 발견, 약 10분 뒤 현장에 도착한 해경 경비정에 의해 선장 강태수씨 등 3명이 구조됐다.


과적과 무리한 운항이 원인 …처벌은 솜방망이

남영호 사건을 조사한 당시 부산지방 해난심판원은 남영호가 기준치(130톤)의 4배가 넘는 감귤 등의 화물 543톤을 제대로 결박도 하지 않은 채 적재하고, 승객을 최대 탑승 인원보다 110명 초과 승선시킨 상태에서 무리하게 운항하다 파도에 휩쓸려 침몰한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당시 검찰은 부작위(마땅히 해야 할 것으로 기대되는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에 의한 살인죄를 함께 적용했으나 법원은 업무상 과실치사죄만 인정했다. "선장이 죽음을 무릅쓰고 사고 발생을 예견하면서까지 과적 운항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법원은 봤다.

관련자 7명이 재판에 넘겨졌고, 남영호 선장에게는 업무상 과실치사만 적용돼 2년 6개월의 금고형이, 선주에게는 금고 6개월에 벌금 3만 원, 통신장에게는 벌금 1만 원이 선고되는 등 3명은 유죄를, 나머지 4명에게는 무죄가 선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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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기자
자료조사= 김지오 DB콘텐츠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