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 12월 14일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남산 외인아파트 준공식이 열렸다. 각각 16, 17층 2개 동으로 지어진 외국인 전용 고급 아파트로 기초공사부터 완공까지 당시 기술을 총동원해 지어졌다.
외인아파트가 지어진 배경은 이렇다. 경제개발계획이 한창이던 60년대 후반, 선진 기술을 전수받기 위해 우리 정부와 기업들은 많은 외국인을 초청했다. 짧게 머무는 외국인 사업가들은 시내에 있는 호텔에 묵었지만, 장기 거주하는 대사관 직원과 상사주재원이 문제였다. 정부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별도의 공동주택을 만들기로 한다. 우선 1967년 한남동에 힐탑아파트를 만든다. 그러나 수요를 감당하지 못했고, 남산에 외인아파트를 추가로 건설하게 된다.
하지만 남산을 가로막은 외인아파트는 서울 시민들에게 흉물이었고, 남산의 역사와 상징성도 훼손한 것으로 평가됐다.
남산은 1394년 한양 정도 이래 6백 년간 서울을 품은 수도의 상징이었다. 남산은 정도 직후 봄과 가을 나라에서 제사를 지냈고, 무학대사를 모신 국사당이 건립되는 등 성산으로 자리했다. 조선시대 봉화의 출발점이자 종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는 침략군의 주둔지로 쓰였고, 1984년 동학농민전쟁 때에는 일본의 신식군대가 진주하는 등 수난도 이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국사당을 허물고 신사를 짓는 등 민족자존심에 큰 상처도 입었다.
광복 이후에는 공원용지로 지정돼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었으나 박정희 정권에서 이러한 계획은 물거품이 됐다. 개발과 공익이라는 이름으로 남산에는 터널이 뚫렸고, 주택단지와 호텔, 군과 중앙정보부 등 기관 건물 등이 잇따라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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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는 1990년 시민들의 여론을 수렴해 '남산제모습찾기사업' 계획에 착수, 수도방위사령부 등을 옮기고 외인아파트를 철거하기로 결정한다.
1994년 11월 20일 오후 3시 정각, 철거 관계자들이 폭파 버튼을 누르자 외인아파트 A동이 8초 만에 먼지구름 속에 자취를 감췄다. 이어 3시 3분 B동도 같은 모습으로 사라졌다. 22년간 남산을 가렸던 외인아파트 철거에는 단 3분이 걸렸다.
철거 장면을 보기 위해 모인 시민들은 손뼉을 쳤다. 그제야 제 모습을 드러낸 남산은 늦가을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철거 후 발생한 남산 외인아파트 폐콘크리트 2만2천㎥는 반포~양재 고속도로 확장공사의 보조기층재로 재활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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