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생인데 에어팟 팝니다" 대학 동문 사이트서 후배 등치는 선배

입력
2021.12.10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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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 인증해야 가입 가능해 믿었는데 뒤통수"
성균관대 커뮤니티에서만 10여 건 피해 호소
경찰, 수사 착수… 전문가들 "계좌이체 피해야"

성균관대 학생 최모(25)씨는 지난 2일 온라인 학생 커뮤니티 '성균관대 에브리타임'의 장터게시판에서 중고 무선이어폰 등을 판다는 글을 봤다. 익명으로 게시된 글이었지만 학적 인증을 거친 이들만 가입할 수 있는 동문 커뮤니티라서 별다른 의심 없이 판매자에게 구매 의향을 밝혔다. 연락을 주고받는 과정에서 자신을 성균관대 모 학과를 졸업한 '10학번 박○○'라고 밝힌 판매자는 그러나 최씨에게 대금을 입금받고도 물건 배송을 차일피일 미루더니 대면 직거래 약속마저 취소하고 잠적했다. 최씨는 "동문 인증을 해야 이용할 수 있는 커뮤니티여서 믿고 거래했다"며 "나 같은 피해자가 10여 명 더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자책했다.

온라인 대학 동문 커뮤니티에서 중고 거래 사기가 빈발하고 있다. 같은 학교 소속이란 신뢰감을 악용하는 행태로 분석된다. 다른 중고 거래 전문 플랫폼이 에스크로(제3자 매매 중개) 결제와 이용자 평가 시스템 등 사기 방지책을 속속 도입하는 가운데, 이 같은 구매자 보호 장치가 전무한 대학생 커뮤니티가 새로운 사기 범죄의 온상으로 떠오르는 모양새다.



‘학교 선배’로 의심 없애고 돈 받으면 잠적

9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서울 관악경찰서는 박모씨와 중고 거래를 하려다가 사기 피해를 봤다는 고소장을 여러 건 접수해 수사하고 있다. 관악경찰서 관계자는 "박씨를 고소한 피해자가 여러 명이며 그중 일부는 성균관대 커뮤니티(에브리타임) 사기 사건"이라며 "현재 수사 중인 사건만 보면 피해액은 수백만 원 규모"라고 밝혔다.

성균관대 피해자들은 에브리타임에서 박씨에게 사기당한 사람이 10여 명으로 총 피해액이 1,000만 원대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에 따르면 박씨의 사기 행각은 올해 10월부터 최근까지 두 달 동안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자신도 박씨에게 피해를 볼 뻔했다는 권태훈(25)씨는 "터무니없이 싼 가격을 제시하지 않아 의심받을 소지를 없애고, 선착순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상대방을 조급하게 만드는 수법을 썼다"고 말했다.

대학 커뮤니티가 사기 행각의 주무대가 된 건 박씨가 학교 동문이라는 사실을 밝히면서 상대에게 신뢰감을 줬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피해자 최씨의 경우 에어팟 프로(18만 원)와 입생로랑 지갑(20만 원) 구매 대금으로 38만 원을 박씨 계좌로 송금했다. 박씨가 "친구 아버지 장례식 일손을 도와야 한다"는 등의 이유로 배송을 미뤘을 때도 크게 의심하지 않았다. 박씨가 졸업생이 아니라면 알기 힘든 학교 얘기를 스스럼없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씨가 물품은 보내지 않으면서 최씨에게 아이패드 등을 추가로 판매하려 하고 한술 더 떠 "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하면서 거래는 깨졌다. 이상한 낌새를 감지한 최씨가 구매를 취소할 테니 38만 원을 돌려달라고 요구했지만, 박씨는 "선배를 범죄자 취급하는 거냐"라며 되레 화를 냈다. 최씨가 재차 환불을 요구하자 박씨는 연락을 끊었다.



'중고 거래' 시대, 피해도 커졌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비대면 거래 증가로 온라인 중고매매 시장은 급격하게 성장했다. 시장조사업체 닐슨코리아클릭에 따르면 국내 스마트폰 이용자 중 중고 거래 플랫폼을 쓰는 순이용자수(UV)는 지난해 6월 기준 1,090만 명에 달한다.

사기 피해도 함께 급증하는 추세다. 유동수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올해 9월 경찰청에서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경찰에 접수된 중고 거래 사기 피해 건수는 지난해 말 12만3,168건으로 2014년(4만5,877건) 대비 2.7배 늘어났다. 피해금액도 지난해 말 기준 897억 원에 육박했다.

이런 추세를 고려하면 에브리타임 중고 거래 사기 피해도 되풀이될 공산이 적지 않다. 회사 설명에 따르면 이 커뮤니티엔 국내 396개 대학 캠퍼스에서 527만여 명이 가입돼 있다. 더구나 각 대학 에브리타임은 대부분 회원 간 중고거래 전용 공간으로 '장터게시판'을 따로 두고 있다. 성균관대만 해도 장터게시판에 이달 7일 하루에 글 55개가 올라올 정도로 중고 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에브리타임엔 안전결제 시스템이 없다. 국내 대표적 중고 거래 플랫폼인 '중고나라'와 '번개장터'가 에스크로 결제 시스템을 도입하고, '당근마켓'이 이용자 평가 제도를 운영하고 있는 것과 대비된다. 이런 안전 장치가 없다 보니, 최씨처럼 계좌이체로 구매 대금을 보냈을 때 판매자가 잠적하면 꼼짝없이 피해를 보는 것이다. 에브리타임이 장점으로 내세우는 익명성 또한 금전 거래에선 독으로 작용하기 쉽다. 게시자 이름이나 아이디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판매자가 그간 커뮤니티에서 어떤 상품을 판매했고 믿을 만하게 거래했는지를 확인할 수 없다.

사전검열 수단인 동문 인증도 무력화될 수 있다. 지난해 1월엔 20대 남성이 개당 3만여 원에 에브리타임 계정을 대량 구매해 1억 원대 사기에 악용한 사례도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대학생 간 신뢰성을 역이용하는 범죄"라며 "거래 시스템이 굉장히 취약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대안 마련에 미온적인 운영진

에브리타임은 개선책 마련에 소극적이다. 최씨만 해도 지난 6일 에브리타임 문의란을 통해 "박씨 계정을 중지하고 경찰 조사에 적극 협조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이용자들의 피해 방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 및 조치를 하고 있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전문가들은 에브리타임에서 중고 거래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인 만큼 회사가 구매자 보호 조치를 속히 내놔야 한다고 주문한다. 경제범죄 전문가인 김대근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법무정책실장은 "운영진이 정보 비대칭성을 완화할 수 있도록 구매자와 판매자의 거래 내역과 신상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대책을 내놔야 한다"며 "거래 안정성을 높이기 위해 에스크로 결제 시스템 도입 등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보호 장치 없이 중고 거래를 할 땐 계좌이체나 택배 배송은 최대한 피해야 한다는 조언도 나온다. 에브리타임 중고 거래 사기 사건을 다수 수임했던 김상훈 변호사는 "피해가 발생해도 상대방 신원 확인이 안 될 가능성이 큰 구조"라며 "굳이 이 플랫폼에서 거래를 하겠다면 서로 만나 직거래하는 게 가장 좋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박준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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