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하면 취직을 해야 하고, 취직을 하면 결혼을 해야 하고, 결혼 후엔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그렇고 그런 삶의 틀. 그 안에서 우리는 내키지 않아도 어쩔 수 없이 수많은 일들을 한다. 이 사회에서 '실격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밀려나고 배제되는 게 달가울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내 주변 사람, 내가 속한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은 욕망을 연료로 삼는다. 그런데 정말 어쩔 수 없는가.
6일 개막을 하루 앞두고 언론에 먼저 선보인 연극 '김수정입니다'는 이런 질문을 정면으로 던진다. 변명만 쌓인 일상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이다. 연극은 연출자이자 배우인 김수정이 '나는 왜 연극을 만들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면서 시작한다. 사랑하지 않은 척, 괜찮은 척하며 살아온 그의 39년 인생을 돌아보는 게 극의 중심이다.
연극은 현실과 무대의 경계를 넘나든다. 두산아트센터의 젊은 예술가 후원 프로그램 'DAC 아티스트'로서 김수정의 마지막 공연을 축하하는 연회가 배경이다. 실제 이는 DAC 아티스트로서 마지막 공연이 맞다. 김수정이 이끄는 극단 신세계 소속 배우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로 연회에 초청돼 김수정의 인생을 파헤치다시피 한다. 개인의 서사에 초점을 맞춘 극의 전반부를 지나, 김수정이 연극계 성폭력 피해자로서 이야기를 꺼내 들면서 극은 '나와 너의 서사'로 전환된다. 후반부에 독백하듯 고해성사하듯 김수정이 자신 안의 비겁함을 말할 때가 되면 이는 관객 개인에게 '나의 서사'가 된다.
'김수정입니다'는 여러모로 틀을 깬 극이다. 시상식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듯한 공연장 전체 분위기부터가 그렇다. 양 끝 무대와 둘 사이를 잇는 긴 복도식 무대가 모두 배우들의 활동 공간이다. 배우들은 무대 주변에 마련된 원형 테이블 관객석까지도 자유롭게 오간다. 자연스럽게 관객은 연회 손님이자 극의 참여자가 된다. 극단 신세계의 전작 '생활풍경'이나 '별들의 전쟁'과 같이 무대의 경계를 허물어 몰입도를 높였다. 영상과 사진, 프레젠테이션 문서 등의 장치를 적절히 사용한 아이디어도 돋보였다. 자전적 연극인 만큼 김수정의 어린 시절 사진 등이 현실성을 강화했다. 배우들이 각자의 삶을 고백하는 장면이나 일부 대사는 다소 직설적으로 연극의 주제문을 보여주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솔직함이 묻어난다.
사회에서 실격당하지 않기 위해 분투하던 김수정의 '실격당하기 위한 첫걸음을 내딛겠다'는 선언은 말로만 끝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관객에게 공연 시간 100분은 일상 속에서 미루고 미루던 자신을 향한 질문에 직면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공연은 25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