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3차례 돈 뺏은 코치, 편파 판정 대가로 1억원 챙긴 심판 [일그러진 스포츠]

입력
2021.12.20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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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스포츠 비리에 '아웃'은 없었다
체육인 4대범죄 1심 판결문 분석 
사건당 평균 10개월간 10회 반복
"폭행 길어지면 성범죄 위험도 높아" 
승부조작도 장기간 반복되는 경향
징계 받고도 재취업에 피해자는 침묵
"최숙현 비극 후에도 바뀐 게 거의 없어"

"엄마 사랑해, 그 사람들 죄를 밝혀줘."

트라이애슬론(철인3종 경기) 국가대표 출신 최숙현(23) 선수가 지난해 6월 극단적 선택을 하던 날 마지막으로 남긴 문자메시지다. 최 선수는 2017년부터 2년 가까이 김규봉 전 감독과 주장 장윤정씨 등 감독과 선배들에게 지속적으로 가혹 행위를 당했다. 최 선수가 폭행당하는 장면을 지켜본 동료 선수 정지은(24)씨는 한국일보에 "숙현이는 1년에 100번 이상 맞았다"고 증언했다.

대한철인3종협회는 최 선수가 세상을 등지고 한 달 뒤인 작년 7월 김 전 감독과 장씨를 영구제명했다. 최 선수를 폭행한 또 다른 선배에게는 자격정지 10년의 징계를 내렸다. 대법원도 지난달 11일 김 전 감독에게 징역 7년을, 장씨에겐 징역 4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이들을 벌 주고 징계했다고 반복되는 비리와 솜방망이 처벌로 점철된 체육계의 고질병이 사라졌을까. 23세의 어린 선수가 생을 마감하기 직전 체육계의 비리 근절을 유서처럼 남겨 놓았지만, 지금도 문제가 된 스포츠 지도자와 심판, 선수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현장으로 돌아오고 있다.

19일 대한체육회에 따르면 작년 한 해 동안 체육회가 지정한 4대 범죄(폭력·성폭력·승부조작·금품수수)를 저질러 종목별 협회의 징계를 받고도 재취업에 성공한 체육인은 13개 종목에서 30명이나 됐다. 최 선수가 생을 마감한 이후에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작년 8월부터 올해 7월까지 4대 범죄로 징계를 받은 지도자와 심판, 선수가 82명이나 쏟아졌다.

그 원인은 피해자가 침묵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현실에 있다. 학교 운동부 시절부터 10년 이상 지도자 폭행에 시달렸다는 전직 빙상선수 정혁주(가명·33)씨는 "선수들은 폭행과 인권 침해를 당해도 침묵한다. 가해자들이 체육계에서 계속 활동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문제 제기하는 선수들은 ‘다시는 이 종목에 발 담글 생각 않고 영원히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피해자들의 호소와 신음은 판결문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일보가 2005~2020년 체육계 인사들이 폭행·성폭행·금품수수·승부조작 등으로 기소된 1심 판결문 85건을 분석한 결과, 체육계 인사들의 4대 범죄는 장기간 반복적으로 행해지는 것으로 파악됐다. 그만큼 잘못된 관행과 강압적인 문화가 체육계 전반에 깊숙이 스며들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0개월간 10회 반복… 70%는 어른들이 저질러

한국일보가 분석한 1심 판결문 85건에 등장한 체육인들의 폭력∙성폭력∙금품수수∙승부조작 사건을 분석한 결과, 평균 306일 동안 9.5회에 걸쳐 범행이 이뤄졌다. 피해자 1명에게 동일한 범죄를 10차례 가까이 반복해서 10개월 동안 저질렀다는 뜻이다.

범죄 대부분은 제자나 후배에게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거나, 경기 진행의 공정성을 지켜야 할 이들이 주도적으로 저질렀다. 4대 범죄 가운데 학교∙실업팀 감독, 코치, 강사, 관장 등의 지도자가 가해자로 등장한 사건은 50건에 달해 전체 분석 판결문의 59%를 차지했다.

선배 선수, 심판, 종목별 단체 및 팀 간부 등이 연루된 사건을 합하면 소위 ‘체육계의 어른들’에 의해 저질러진 범죄 비율은 70%를 넘는다.

스포츠 비리 범죄가 특정 종목에 편중되지 않는 것도 판결문 분석을 통해 확인됐다. 인기 스포츠인 야구∙축구뿐 아니라 빙상∙수영∙태권도처럼 세계대회가 열리면 국민 관심이 집중되는 종목, 그리고 e스포츠와 줄넘기까지 무려 25종목에 달했다.

223회 돈 뜯은 코치, 151회 걸쳐 1억 챙긴 심판

금품수수는 체육인들이 저지른 4대 범죄 중 '장기간' '반복적' 범행의 특성이 가장 두드러진 유형의 사건으로 분석됐다. 금품수수는 전체 비리 사건 85건 중 26건으로 가장 많았으며, 범행기간은 평균 1년 2개월(432일)에 달했고, 해당 기간 동안 20차례에 걸쳐 금품이 오갔다.

금품수수 사건 중에선 중학교 레슬링부 코치가 13세 제자를 상대로 4년 10개월 동안 223회에 걸쳐 1,046만 원을 뜯어낸 사례도 있었다. 이 코치는 지도자라는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제자가 요구한 금품을 가져오지 않을 때마다 레슬링 훈련을 빙자해 그를 폭행했다. 코치의 금품 요구에 시달린 제자는 야간에 택배 아르바이트까지 하며 상납할 돈을 마련해야 했다. 농구 지도자들에게 편파 판정을 부탁받고, 5년간 1억여 원을 151차례에 걸쳐 상납받아 챙긴 심판도 있었다.

허정훈 체육시민연대 대표는 “이런 사건은 현장에서 묵묵히 일해온 체육인들에게는 치욕스러운 일”이라면서도 “문제는 이런 비리 인사들이 아직도 체육계에 많다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체육계 일각에선 금품수수가 장기간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이유로 열악한 처우를 꼽기도 한다. 고용이 불안정하고 급여도 높지 않아 금품비리 유혹에 넘어가기 쉽다는 것이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산하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이 지난해 12월 펴낸 ‘2020 체육인 실태조사’에 따르면 61개 종목 지도자 2만4,712명 가운데 74.1%는 비정규직이었다. 학교운동부와 공공스포츠클럽 등의 지도자 수입은 연간 1,700만~2,500만 원으로 임금근로자 연평균 수입의 52~70% 수준이다. 정현우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 박사는 “최근 들어 지도자들의 고용 형태가 무기계약 형태로 전환되고 있지만 대부분 최저시급을 겨우 넘는 실정이고, 지도자 경력이 쌓여도 연봉은 오르지 않는 구조적 문제도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처우 문제가 체육인들의 금품수수 행태를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 대다수의 의견이다. 허 대표는 “신분의 안정성을 잃은 체육인 일부가 이러한 행위로 ‘모험’을 거는 것”이라면서 “더 강한 징계 등으로 일탈이 합리화될 수 없다는 인식을 심어줄 필요가 있다”고 했다.


성범죄와 같이 저지른 ‘제자 폭행’

대전의 한 초등학교 여자 농구부 코치는 11세에 불과했던 제자 9명을 상대로 장기간에 걸쳐 가혹 행위를 했다. 코치는 경기에 졌다는 이유로 머리를 열쇠로 때리는 등 1년 5개월간 19회에 걸쳐 제자들을 번갈아가며 폭행했다. 구타를 저지르는 동안 피해자 9명 중 6명은 성추행도 당했다. 지도자가 폭행과 성폭력을 같이 행사한 것이다.

전문가들은 지도자가 선수에게 가하는 폭력은 성폭력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설명했다. 스포츠인권연구소 사무처장을 맡고 있는 정용철 서강대 교수는 “감독과 코치는 경기력 향상을 이유로 선수의 사생활을 통제하고 훈련 과정에서 폭력을 쓰는데, 이를 ‘사랑의 매’로 미화해선 안 된다"고 지적했다.

선수를 아껴서 때렸다며 다친 부위에 약을 발라주면서 위로하는 경우가 대표적인데, 일부 선수들은 1년 이상 이런 경험을 거치면 감정이 무너지기도 한다. 김대희 한국체육정책학회 상임이사(부경대 교수)는 "지도자의 폭력이 성폭력으로 이어지는 경우를 보면 대부분 이런 과정을 거치게 된다"며 "지도자의 폭행이 오랫동안 되풀이될수록 선수가 성범죄에 노출될 위험도 높아지는 셈"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일보가 분석한 체육계 지도자의 제자 폭력 사건들도 대부분 ‘장기간-반복적’이라는 측면에서 성폭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단발성으로 끝난 사건은 거의 없었으며, 대부분 6개월 이상에 걸쳐 최소 4차례 이상 폭행이 반복됐다. 7년 동안 지속적으로 구타당한 10대 선수도 있었다. 모두 지도자 말에 절대적으로 따라야 하는 등 위계를 중시하는 문화 속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승부조작도 장기간·반복적 "불법 도박사이트 활용”

한국일보가 분석한 체육계 4대 범죄 중에선 승부조작 사건도 적지 않았다. 85건 중 23건으로 전체의 27%를 차지했다. 판결문에 나오는 승부조작 범행은 한 번 시작되면 평균 7개월 동안 세 차례에 걸쳐 진행됐다. 폭행과 금품수수 등 다른 유형의 범죄와 마찬가지로 장기간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특징을 보였다.

판례 분석을 자문한 법률서비스 스타트업 리걸엔진의 박성남 변호사는 “승부조작이 의도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시도했다가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기를 반복하면서 범행 기간과 횟수가 늘어났다”고 설명했다.

불법 도박사이트를 활용한 승부조작 사건 비율도 60%에 달했다. 박 변호사는 “승부조작을 저질러 퇴출당한 운동선수들이 아예 불법 도박사이트를 이용하는 전업 브로커로 나서는 경우가 많은 점도 승부조작이 반복되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23건의 승부조작 사건 중 절반 가까운 11건이 전업 브로커들에 의한 범행으로 집계됐다.

전문가들은 승부조작 근절을 위해선 불법 도박사이트 업체는 물론이고 브로커와 이용자 모두를 강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대희 교수는 “승부조작에 휘말리는 현역 선수들은 ‘전직 선배’인 브로커들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의 플레이가 승부조작인 줄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며 “선수 처벌이나 징계에만 집중해선 안 되고, 불법 사행업체와 이용자 모두를 엄격히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윤현종 기자
조소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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