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도 누군가 '정희야'라고 부르면 가해자가 내 이름을 불렀던 생각이 나서 너무 고통스러워요."
최근 경기도의 한 사무실에서 만난 양정희(34·가명)씨가 몇 번을 망설이다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실업 육상팀 여성 코치인 양씨는 지난해 8월과 올 2월 같은 팀 남성 코치로부터 두 차례 성추행을 당했다. 그는 첫 피해를 당하고 1년이나 지난 올 9월 가해자를 고소했는데,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가해자는 양씨에게 '양 코치'란 호칭 대신 늘 '정희야'라고 불렀다. '정희야'라는 말을 입에 담을 때마다 양씨는 몸서리를 쳤다. 이 같은 증상이 계속되자, 심리 치료사는 그에게 "개명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고 권유했다. 무엇이 양씨를 움츠러들게 만들었을까.
농구 선수였던 양씨는 21세 때 육상으로 종목을 바꿨다. 육상 전향 3년 만에 전국대회 2관왕을 차지하는 등 8년 동안 국내 중장거리 간판 선수로 활약했다. 그는 2019년부터 실업팀 코치로 제2의 육상 인생을 시작했지만,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
가해자는 양씨보다 한 살 많은 같은 팀 선임 코치였다. 그는 양씨에게 "선생님 말고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다. 양씨가 "선수들 앞에서 그러면 안 되죠"라고 받아넘겼지만, 가해자의 행태는 점점 도를 넘었다. 가해자는 양씨에게 "너는 오빠에게 술을 좀 배워야 한다"며 술을 권하거나 "오빠의 진심을 알아달라"며 전화하고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가해자가 두 아이를 둔 유부남이라 양씨의 마음이 더욱 불편했다.
지난해 8월 강원도 전지훈련 당시 양씨의 호텔 숙소에서 '철컥 철컥' 문고리 돌리는 소리가 났다. 가해자는 "오빠 이렇게 밖에 세워 둘 거냐"고 물었고, 양씨는 그를 돌려보내기 위해 문을 열었다가 속옷 차림의 가해자를 보게 됐다. 실랑이 끝에 겨우 문을 걸어 잠근 양씨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가해자는 다음날 "기억이 안 난다. 미안하다. 감독님께 알리지 말아달라"고 사정했다. 양씨는 고민 끝에 신고를 포기했다. "팀에 여성 코치가 들어온 걸 반기지 않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코치로 부임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고, 분란 일으키는 사람으로 낙인찍힐까 두려웠어요."
양씨는 당시 사건을 언급하며 오른 손목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끔찍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지금도 온 힘을 다해 문고리를 잡고 버티는 것처럼 손목이 아프다고 했다.
양씨는 올해 2월 두 번째 피해를 당했다. 제주도에서 전지훈련을 하던 중 가해자는 "상의할 게 있다"며 자신의 방으로 양씨를 부르더니, 갑자기 껴안으려고 했다. 양씨는 가해자를 겨우 밀쳐 낸 뒤 빠져나왔다. "방에 와서 온 몸을 털어냈어요. 그 사람 몸이 잠깐 스쳐간 목덜미는 뜯어내고 싶을 정도였어요." 양씨는 이번에도 속으로만 고통을 삭이고 있었다.
두 번째 피해를 당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양씨는 가해자가 팀의 한 선수에게 비슷한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양씨는 선수를 껴안고 "미안하다"고 울고 또 울었다. "진작 제 피해를 털어놨다면, 제가 경찰에 알렸다면, 우리 선수가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저는 선수를 못 지킨 비겁한 지도자예요. 용기도 없었고요." 양씨는 인터뷰 내내 자책하며 계속 눈물을 쏟았다.
피해 선수의 고소로 가해자는 지난 10월 1심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았고 체육회로부터 영구 제명을 당했다. 피해 선수는 경찰 조사와 재판이 이어지는 동안 약을 먹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도 악착같이 훈련에 매달렸다고 한다. 양씨에겐 그 모습이 '자신은 괜찮다'는 걸 보이려는 몸부림처럼 보였다. 그렇게 애쓰는 선수를 바로 옆에서 지켜보는 양씨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졌다.
직장을 잃을까 두려워 입을 다물었던 양씨는 자신이 미리 알리지 못해 선수까지 피해를 봤다는 죄책감에 자신의 피해를 주변에 알렸다. 가해자는 그러자 용서를 구하기는커녕 "CCTV도 다 지워졌다. 증거가 어디 있느냐"며 되레 큰소리를 쳤다.
양씨는 뻔뻔하게 발뺌하는 가해자 태도를 보면서 형사고소를 결심했다. 그는 기억을 되살리고 문자메시지와 통화내역, 위치 확인 등 모든 자료를 긁어모아 수사기관에 제출했다. 경찰은 최근 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했다.
양씨는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면서 중장거리 여성 선수를 제대로 키워 보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제자들의 실력이 향상되는 걸 지켜볼 때면, 자신이 선수 시절 가장 먼저 피니시 라인을 통과했을 때의 희열보다 더한 벅찬 감정을 느꼈다. 양씨 수첩엔 선수들의 컨디션과 기록 추이, 장단점 등을 적은 메모가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그가 지금 바라는 건 가해자의 온전한 처벌이다. 양씨에 따르면 가해자는 2심에서 형량을 낮추기 위해 피해 선수와 끊임 없이 합의를 시도하고 있다. 선수는 합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비슷한 사건에서 가해자가 감형받은 사례가 많다는 이야기를 접하고, 피해 선수와 양씨 모두 요즘 밤잠을 설치고 있다. 양씨는 "절대 선처는 안 된다"며 재판부에 제출할 호소문을 보여줬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저는 선수가 피해를 당한 뒤 힘들어하는 모습을 바로 옆에서 지켜봤습니다. 퉁퉁 부은 눈으로 새벽 훈련에 참여하고 약을 먹고 비몽사몽한 상태로 훈련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도움을 줄 수도 없고 용기도 없는 저를 탓할 뿐이었습니다. OOO 코치(가해자)는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선수에게 아무리 씻어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재판장님, 선수의 안전과 보호를 위해 제발 가해자를 선처하지 말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