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년 12월 9일 베트남 파병 장병 범국민 환영대회, 청룡부대 1진 귀국

입력
2021.12.09 05:30
1971년 12월 9일
불행한 과거사 안고 6년 2개월 만에 귀환
1973년 최종 철수까지 약 32만5천여 명 국군 파병

편집자주

한국일보 DB 속 그날의 이야기. 1954년 6월 9일부터 오늘날까지, 한국일보 신문과 자료 사진을 통해 '과거의 오늘'을 돌아봅니다.

1971년 12월 9일 오전 8시 30분 부산항에 미해군수송선 업셔호가 입항한다. 배에선 구릿빛으로 그을린 1천여 장병들이 내렸다. 오랜 전투와 긴 항해에 지쳤을 장병들은 이내 도열해 환영대회를 준비했다. 오전 11시 환영대회가 열렸다. 병사들은 김종필 당시 국무총리를 비롯한 각계 인사와 가족, 시민 등 3만여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귀국신고를 한다.

이들은 베트남 파병 한국군 1단계 철수계획에 따라 철수한 청룡부대 1진이었다. 청룡부대는 1965년 10월 3일 부산항을 통해 우리나라 국군 최초로 해외 파병을 떠났다. 그리고 파병 6년 2개월 만에 베트남 다낭항에서 미해군수송선 업셔호를 타고 남지나해를 지나 다시 부산항으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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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 처음 베트남전쟁에 파병한 건 1964년이다. 당시 의무·건설지원단 등 비전투부대만 사이공(당시 남베트남 수도)을 찾았다. 이후 1965년 5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미국 방문 이후 전투병력의 베트남 파병 논의가 가속화됐고, 1965년 8월 13일 여당인 공화당만이 국회에 단독 참석하여 전투부대 파병 동의안을 가결시켰다.

이후 1973년까지 약 32만5천여 명이 베트남전에 투입됐다. 전쟁에서 한국군의 희생은 전사자 5,099명과 부상자 1만1,000여 명에 달했다.

희생은 한국군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쟁이라는 불행한 역사 속 한국군에 의한 여러 민간인 학살도 발견됐다. 2020년 4월에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생존자 응우옌티탄 씨가 한국 정부를 상대로 첫 국가배상을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그에 따르면 한국군이 1968년 2월 12일 베트남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비무장 상태의 민간인 74명을 학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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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성 기자
자료조사= 김지오 DB콘텐츠팀 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