팰롱팰롱, 돌랑돌랑, 아도록한, 지꺼진. 제주 구좌읍 세화마을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숙소의 방 이름이다. 예컨대 ‘아도록한(아늑한) 방안에서 팰롱팰롱(반짝반짝) 눈부신 바다를 보면 가슴이 돌랑돌랑(두근두근)거리고 무언가 지꺼진(기쁜) 일이 생길 것 같다’라고 쓸 수 있다. 제주 시내에서 동쪽 성산으로 이어지는 바닷가에 세화리가 있다. 새하얀 모래에 쪽빛 바다, 머릿속에 그리는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간직한 오름, 인스타그램 성지로 오르내리는 카페와 공방, 초록이 싱그러운 당근밭, 거기에 가슴 쓰린 역사와 해녀 이야기까지 제주의 매력이 응축된 곳이다.
세화리가 제법 알려진 건 한 달에 두 번 열리는 벼룩시장 ‘벨롱장’ 덕분이다. 토요일 오전 11시부터 2시간 열리는 ‘반짝’ 시장으로, 제주 전역에서 판매자가 몰리고 그 짧은 시간에 3,000명 이상이 다녀가는 장터였다. 코로나19 이후 지금은 중단된 상태다.
세화마을 여행은 해변 서쪽에 자리 잡은 질그랭이거점센터에서 시작한다. ‘질그랭이’ 역시 ‘지긋이’라는 뜻의 제주어다. 일종의 여행자 센터로 주민들에게는 일상을 누리고 채우는 공간, 방문객은 편하게 머물며 언제든 다시 찾는 명소가 되길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1층부터 4층까지 각각 세화리사무소, 카페477+, 구좌주민여행사, 세화스테이로 구성된다.
2층에 위치한 '카페477+'는 리정세(마을세)를 내는 477명의 조합원이 참여해 만든 카페라는 의미다. 리정세는 제주에만 있는 제도로 세화리의 경우 연 1만 원씩 3년을 내야 조합원 자격이 주어지고, 이렇게 모은 돈은 마을 공동기금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플러스(+)는 세화리를 찾는 여행자와 새로운 조합원을 위해 비워 둔 마음 공간이다.
세화는 예부터 구좌읍의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돼 있었고, 초·중·고등학교가 모두 있어 생활이 편리한 곳이다. 이 때문에 외지인들이 꾸준히 정착해 지금은 이주민과 토박이 숫자가 비슷한 수준이라고 한다. 이주민은 회사를 그만둔 직장인, 갓 결혼한 신혼부부, 농사짓는 청년과 화가까지 다양하다. 그래서일까, 제주 다른 지역에 비하면 텃세가 거의 없는 것도 세화리만의 특징이라고 한다.
이 카페에서 가장 추천하는 메뉴는 커피가 아니라 당근주스다. 갓 수확한 당근을 즉석에서 짜서 내리는 100% 당근주스다. 단맛을 내는 첨가물이 없어 풋내가 날까 싶은데 의외로 달고 상큼하다. 구좌읍은 이맘때 전국 당근의 60% 이상을 생산하는 명실상부 당근의 고장이다. 겨울의 길목에 들어선 요즘도 제주 들판은 푸릇푸릇하다. 대개 무가 많지만, 구좌 들판에는 당근밭이 흔하다. 당근주스 외에 수제오렌지차, 백향과에이드, 감자빵 등 제주 농산물로 만든 먹거리가 메뉴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화의 여러 공방에서 제작하는 기념품과 생활소품 매장도 카페에서 중요한 공간이다.
주민여행사가 입주한 3층은 공유오피스로 개방돼 있다. 요즘 심심찮게 듣게 되는 워케이션(일과 휴가의 합성어) 공간이다.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카페 문을 여는 동안 무료로 무제한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직원들에게 절대 눈치를 주지 않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음료 한 잔 시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이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는 세화리 발전에 밑거름이 될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죠.” 양군모 마을PD가 밝힌 공유오피스 운영 원칙이다.
주민여행사의 프로그램을 이용하면 해녀, 오름, 밭담 등 테마별 주민해설사가 들려주는 구좌읍 12개 마을의 숨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추천 맛집은 덤이다.
‘세화마을 스탬프 투어’ 안내장 하나 들고 마을 나들이에 나서도 좋다. 질그랭이센터에서 나오면 동편에 바로 바다가 펼쳐진다. 세화해변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다. 용암이 흘러 굳은 검은 현무암이 가장자리에 흩뿌려져 있고, 그 사이사이를 새하얀 모래가 채우고 있다. 물에 발을 담그기는 차가운 날씨지만, 바위와 모래를 오가는 해변 산책만으로도 가슴이 뻥 뚫린다. 세화 앞바다는 수심이 깊지 않다. 해변으로 밀려들며 얇게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가 또 세화해변의 매력이다.
해변 서쪽 방파제 끝에 등대가 세워져 있다. 갈치와 한치잡이 어선의 길잡이 역할이 주 목적이지만, 여행자에게는 쪽빛 바다를 배경으로 선 하얀 등대가 미지의 세계를 꿈꾸게 한다. 해변 동쪽 끝에는 직사각형으로 담을 쌓은 돈물통이 2개 있다. 한라산 중턱에서 땅으로 스몄다가 해안가에서 솟아나는 용천수, 이른바 삼다수가 솟는 샘터다. ‘돈’은 제주어로 ‘달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니 세화리 돈물통은 단물이 솟는 샘이다.
해변 중앙에서 마을로 올라가다 보면 도로 왼편에 넓은 공원이 나온다. 언덕에 ‘제주해녀항일운동기념탑’이 높이 솟아 있다. 1920년 제주도해녀어업조합이 조직됐다. 그러나 도지사가 조합장을 겸임하는 어용 조합으로 변질되며 횡포가 날로 심해갔다. 해녀들은 관제 조합 반대, 해산물 가격 재평가 등을 요구하며 1932년 1월 7일과 12일 세화 장날을 이용해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결국 도지사가 요구 조건을 수용하기로 약속했지만, 일제는 도내 청년 운동가들을 대대적으로 검거하기 시작했고, 이를 저지하는 해녀들의 시위가 또다시 이어졌다.
제주해녀항일운동은 238회 열린 집회에 1만7,130명이 참가한 대규모 투쟁으로 제주 3대 항일운동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기념탑 옆에는 당시 시위를 주도한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세 해녀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이곳 외에 옛 오일장터와 구좌읍사무소, 세화주재소 등이 세화 항일운동을 증거하고 있다.
세화에서 해변을 따라 약 2㎞ 떨어진 하도리 포구에는 별방진이 남아 있다. 조선 중종 5년(1510) 제주목사 장림이 김녕의 방호소를 옮겨 축성한 진지다. 하도 앞바다 우도 부근에 빈번히 출몰하는 왜구를 효과적으로 막기 위한 방어 시설이었다. 당시의 절박함은 사라지고, 높이 2m, 약 920m 타원형 석축으로 둘러진 마을 풍경이 고즈넉하다.
세화리 골목을 돌아다니다 보면 마을에 작은 변화를 일으키고 있는 잡화점과 공방 등을 여럿 발견할 수 있다. 간판이 요란하지 않아 일부러 찾지 않으면 스치게 마련이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제법 소문난 가게들이 많다.
세화착유소·제분소 옆에 더부살이하듯 붙어 있는 노란색 간판이 눈에 띈다. ‘라이스나이스’라는 떡 가게다. 40여 년간 방앗간을 운영해 온 할머니가 만드는 떡을 손녀가 소형 포장해 판매하고 있다. 제주쑥인절미와 절편, 통팥앙금떡과 보리개역(미숫가루) 등이 인기 품목이다. 문을 닫으려던 할머니의 방앗간이 손녀의 아이디어로 활력을 찾았다. 문 앞에 동백 열매를 햇볕에 말리고 있다. 꽃이 막 피기 시작하는 요즘이 열매가 많이 떨어지는 시기이기도 하다. 동백기름 짜느라 방앗간도 덩달아 바쁘다.
이 외에 생활 소품과 다양한 잡화를 판매하는 아코제주, 감귤껍질·약쑥과 같은 천연 재료를 활용한 수제 비누와 디저트를 판매하는 오가닉제주, 동양화 공방과 카페를 겸하고 있는 먹꽃이피는숲, 농약종묘사 간판을 달고 그대로 영업 중인 여름문구사 등도 세화 여행을 한결 특별하게 만들어 줄 동네 가게들이다.
세화는 ‘가는 곶’에서 유래한 지명으로 보고 있다. 곶은 제주어로 숲이다. ‘가는 곶’은 세화해변에서 약 7㎞ 떨어진 아끈다랑쉬오름부터 마을까지 이어지는 가느다란 숲을 의미하는데,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곶을 꽃으로 해석해 ‘가는 꽃’ 세화(細花)가 됐다고 한다.
마을에서 뒤편 산자락으로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정면에 우뚝 솟은 산봉우리가 보인다. 다랑쉬오름(382m)이다. 분화구가 마치 달처럼 둥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래서는 거대한 봉분처럼 보이지만 정상에 오르면 깊고 커다란 분화구가 선명하다. 바로 옆의 아끈다랑쉬오름(192m)은 새끼 다랑쉬라는 의미다.
탐방로는 두 오름 사이 주차장에서 연결된다. 다랑쉬오름은 경사가 가파른 만큼 시작부터 오르막이다. 삼나무 숲 사이 계단을 통과해 한숨 돌리며 뒤를 돌아보면 이미 아끈다랑쉬오름보다 높이 올라와 있다. 억새가 빼곡하게 덮인 아끈다랑쉬 풍경이 잘 구운 파이처럼 보인다. 그 너머로 성산일출봉과 우도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지그재그라고 하지만 능선까지는 가파른 오르막의 연속이다. 대신 시야는 더욱 넓고 시원해진다. 주변의 목장과 평야, 제주 동북부 일대의 바다까지 거칠 것 없는 풍경이 펼쳐진다. 드디어 능선에 당도하면 반전의 풍광이 기다리고 있다. 분화구의 깊이(115m)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한라산 백록담과 같고, 산굼부리(132m) 분화구에 이어 두 번째로 깊다. 분화구 안 경사는 올라온 길보다 더 가파르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화산과 오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분화구 위를 한 바퀴 도는 산책로만 약 1,500m에 이르러 주변 일대를 두루 조망하기 좋다. 능선의 가장 높은 곳을 걸을 때는 정면으로 눈 덮인 한라산이 보이고, 낮은 곳에는 저절로 자라난 소사나무가 군락을 이뤄 백색의 나뭇가지 터널을 통과한다.
제주에는 아직 억새가 한창이다. 표선면 가시리에 위치한 따라비오름은 분화구와 능선에 억새가 만발해 가을에 가장 아름다운 오름으로 꼽힌다. 3개의 분화구와 6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어 층층이 부드럽게 이어진 능선도 아름답다. 높이는 다랑쉬오름과 비슷하지만 경사가 심하지 않아 한결 쉽게 걸을 수 있다. 두 오름 모두 한 바퀴 돌아오는 데에 각각 1시간 30분가량 걸린다.